매일신문

[책] 요즘 20대 여성들의 생활모습은?

나의 블랙 미니 드레스/김민서 지음/휴먼앤북스 펴냄

'20대 여성의 머리에 무엇이 들었을까.'

대학을 막 졸업한 나는 스물 네 살이고 빈둥빈둥 놀고 있다. 어학 연수를 가든, 휴학을 하든 한 두 해 정도 더 학교에서 미적거리며 놀 수 있었는데 4년 만에 졸업하고 말았다.

나와 친구 셋은 대학 입학과 동시에 친구가 됐고 졸업한 지금도 여전히 자주 어울린다. 우리 넷은 가장 빛나던 이십대 초반을 공유했다. 놀고 마시고, 남자를 만나고, 또 놀고 새로운 남자를 만나면서 원 없는 대학시절을 보냈다. 공부 따위는 애초에 관심이 없었다. 그럼에도 우리 앞에는 화려한 인생이 펼쳐지기로 돼 있었다. 그렇지 않아야 할 이유가 어디에 있다는 말인가? 집은 부유한 편이고, 그럭저럭 간판 좋은 대학을 졸업했다.

우리는 온갖 직업을 무시하는 일에 통달해 있었다. 회사원? 회사에 가봐야 고등학교만 졸업해도 할 수 있는 일을 한다는데, 우리에겐 안 맞지. 헤어 디자이너? 디자이너는 아무데나 갖다 붙이면 다 디자이너냐? 그래봤자 미용실 언니 아냐? 루이비통 매장 직원? 장난해? 그래봤자 백화점 매장 직원 아냐? 학원 강사? 학원 선생이란 명함을 어디 써먹어. 은행 직원? 하루 종일 카운터에 앉아 통장 개설하고 카드나 만드는 직업? 아서라.

우리는 졸업 후 당연히 이 사회에서 한자리를 당당히 차지하고 우아한 생활을 누리리라 확신하고 있었다.

내게도 무기는 있다. 24세라는 젊은 나이와 웬만한 곳 어디에서라도 통할 미모, 그리고 그럴듯한 학벌이다. 남루한 취직이 어렵다면 화려한 '취집(결혼)'쪽으로 돌리면 된다. 돈 많고 잘 생긴 남자가 나타난다면 당장에라도 결혼해 버릴 수 있다.

여자들은 연기의 달인이다. 돈 많고 분위기 있는 남자들이 즐겨 찾는 클럽에서 우리는 도도한 표정을 잃지 않는다. 춤을 출 때도, 걸음을 옮길 때도, 술잔을 기울일 때도 결코 품위를 잃지 않는다. 그러나 일단 화장실에 들어서면 하이힐 때문에 불이 붙을 것 같은 발을 절뚝거리고 욕지거리를 쏟아내고, 화장을 고치고, 속에 든 것을 토악질 해낸다. 그리고 다시 멀쩡한 얼굴로 무대로 나간다.

마음에 드는 남자가 '술 좀 해?' 라고 물으면 '잘은 못하는 데 분위기는 즐겨'라고 대답할 줄 안다. 물론 나는 새벽이 밝아올 때까지 퍼마실 수 있는 실력을 갖추고 있다. 나는 게을러 터졌지만 좋은 조건의 남자와 결혼하는 친구의 결혼식에 가는 날엔 아침 여덟시부터 일어나 얼굴에 팩을 한다. 그리고 결혼식장에서는 잘나고 돈 많아 보이는 남자와 눈이라도 마주치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물론 티내지 않고….

고성능 카메라보다 더 뛰어난 관찰력 역시 나(우리)의 무기다.

처음 보는 남자와 인사를 나눌 때, 딱 1초에 열컷 이상 눈으로 찍어낸다. 전체적인 스타일과 벨트, 운동화와 걸치고 있는 액세서리의 브랜드, 셔츠 속에 감춰진 대략적인 몸매, 힙 업 상태까지 모조리. 물론 그가 가진 자동차 키의 로고 역시 단 한 순간 확인이 가능하다. 이런 내 속을 어른들이 보았다면 이렇게 말할 것이다.

'아이고 한심한 년아…. 아이고 썩을 년아…. 내 머리 끄덩이라도 잡고 싶다. 남자 잘 물어서 팔자 고칠 그 열정으로 공부를 좀 해 보소.'

그러나 나는 공부가 싫다. 남들처럼 노력해서 남들처럼 얻을 수 있다면 뭐 좋을 게 있나. 나는 젊고 예쁘고 늘씬하지 않은가 말이다. 내게는 꿈이 없다. 그러니 그 꿈을 실현하기 위해 치러야 할 고통의 과정을 모른다. 내게는 열정이 있지만 그 열정을 소진해야 할 대상이 없다. 그러니 놀 수밖에. 놀면서 나는 내 인생을 비싼 값에 스카우트 해 줄 사람을 기다린다. 내가 알지 못하는 재능, 내게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는 재능을 누군가가 발견해 주기를 말이다.

나를 기쁘게 하는 것들은 많다.

남자 친구가 사준 샤넬 쇼핑백을 들고 오가는 사람들을 구경하며, 남자 친구가 외제차를 빼서 내 앞에 대령할 때까지 기다리는 순간 행복하다. 내 손에 비싼 구두가 있고, 외제 승용차가 내 앞에 서고, 남자 친구가 자동차 문을 열어주고 나는 그 안으로 내 몸을 집어넣고…. 나머지는 어떻게 굴러가든 상관없다.

물론 나를 기분 나쁘게 하는 것들도 있다.

늘 놀기만 하던 친구가 조건이 무척 좋은 남자와 결혼했다. 이건 내가 바라던 바이지만 남에게 닥친 행운인 만큼 분개해야 마땅하다.

'그렇게 생활이 방탕했던 애가 어째서 그렇게 좋은 조건의 남자를 만나 행복할 수 있다는 말이야?'

내 화려하고 방탕한 20대에도 긴장과 두려움의 순간은 있다. '임신 여부 테스트'. (이 소설에서 유일하게 긴장이 느껴지는 부분은 '임신 테스트' 장면이다. 소설 속에 단 한 번뿐인 이 긴장감 때문에 20대 미혼 여성의 걱정은 임신 걱정뿐이라는 느낌마저 든다.)

'엄마의 빽'으로 방송국 막내 보조 작가 자리를 얻었다. 정말이지 지루하고 힘들고 무의미한 노동이다. 남들은 그렇게 얻기 어렵다는 보조 작가 자리. 하지만 나처럼 잘난 여자에게 이 따위 막내 작가 자리는 가당치 않다. 한 며칠 일해보고 그만둘 작정이다. 이렇게 일하고 한 달에 백만원도 못 받는다니 그게 말이나 돼? 나는 목동에 살지만 늘 압구정동에서 놀던 사람이다. 인생 역시 '압구정동 급'으로 살고 싶다. 화려하게 펑펑 쓰면서 말이다. 힘들게 사는 많은 다른 사람을 생각하라고? 내가 왜?

이 소설은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20대 여성의 풍속과 세태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물론 한국의 20대 여성이 모두 이 소설의 주인공처럼 살지는 않는다. 그러나 많은 20대 여성들은 부모 덕에 살면서도 부모의 노고를 우습게 알고, 한 푼도 벌어본 적이 없으면서 명품으로 치장하기 좋아하고, 클럽에서 밤새워 남자들과 놀기를 좋아한다. 천신만고 끝에 얻은 직장, 땀 흘려 일하는 가치를 우습게 여긴다. 대학 시절 내내 놀면서도 졸업 후에는 화려한 삶이 펼쳐질 것이라고 믿는다.

그녀들은 꿈이 없다. 대상을 찾지 못한 젊음의 열정은 낭비될 뿐이다. 당연한 결과로 그들 앞에는 '88만원짜리' 직장도 없다.

이 소설은 젊고 감각적이지만 삶의 처절한 무게를 간직한 이른바 '20대 여성 성장소설'이다. 20대를 거쳐갔거나, 20대를 살아가거나, 20대를 기다리는 여성들이라면 공감할 만한 이야기들이 유머와 위트, 잘 짜여진 구성 속에 녹아 있다.

주인공 '나'가 해외 자전거 여행을 꿈꾸며 서울 시내를 자전거로 달린다는 이야기, 마음에 들지 않는 '방송 보조 작가'일을 계속한다는 이야기는 20대 여성이 '중심'을 찾아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마음에 드는 일을 위해 마음에 들지 않는 일을 감내하는 것은 '고통'의 시간이자 '성장'의 시간이다. 성장하기 위해서는 성장통이 불가피하며, 성장통을 외면하는 한 성장은 없다고 작가는 말한다. 312쪽, 9천500원.

조두진기자 earful@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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