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 단속 못하니 돈 단속도 못해
나는 비상금이 없다. 모으려고 작정하면 모을 수 있는데 없는 것을 보면 내게 문제가 있는 셈이다. 그래서 남들이 비상금을 얼마 가지고 있다고 자랑하는 것을 보면 대단하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아내에게 말하지 않고도 견딜 수 있는 그 무거운 입에 경의를 표시하고 싶을 정도이다.
내가 아내로부터 받는 용돈은 교통비와 점심 식사비, 그리고 담배를 사 피우거나 소소하게 술자리를 갖게 되면 모두 쓰게 된다. 우리 회사에는 성과급이라는 것이 있다. 물론 아내는 모르는 돈이다. 거기에다가 로또 복권 4등이라도 되면 몇 만원을 쥘 수 있다. 지금까지 다섯번이었고 예전에는 10만원이나 되었다. 이 또한 아내가 모르는 돈이다.
그런데 이 돈을 나는 아직까지 한 푼도 모으지 못했다. 이유는 단 하나밖에 없다. 내 입이 문제이다. 나는 아내가 모르는 돈이 생기면 아내한테 인심을 쓰고 싶어 안달하는 스타일이다. 완전히 쥐여 사는 남편도 아닌데 왜 그런지 나도 모르겠다. 하여튼 아내를 기쁘게 해줄 수 있는 일이라면 무조건하는 성격 탓에 입을 다물지 못하고 돈을 아내 손에 넘겨버린다. 사정이 이러니 다른 직원들이 '성과급 입 다물기'하면서 모두들 비상금을 챙길 때, 나는 그것을 챙기지 못한다. 그렇다고 아내에게 '성과급이야'하고 주게 되면 다른 직원들의 아내들이 알게 되어 직장에서 왕따 감이 되기에 딱 좋다. 결국 성과급 얘기는 없이 아내에게 돈이 넘어간다. 성과급을 받거나 로또 당첨금을 받는 날이면 나는 아내를 불러낸다. 분위기 좋은 레스토랑에서 돈을 넘겨준다. "당신 사고 싶었던 것이 있으면 사도록 해." 이제 아내는 이 돈이 무슨 돈인지 묻지도 않는다.
당연히 내가 용돈을 아껴 쓰고 모은 거라 생각하는 눈치다. 하긴 그동안 내가 계속 그 레퍼토리만 읊어댔으니 당연한 일이다. 그래서 지난번에는 성과급을 손에 쥐고 굳게 결심했다. "이제는 좀 모아서 비상금이라는 것을 좀 챙겨봐야지." 하지만 그 결심은 이틀을 가지 못했다. 아내의 앓는 소리를 들어버렸다. "이번 달은 지출이 좀 많네요. 집안 행사가 많아서." 나는 그 이튿날 아내 손에 성과급을 온전히 넘겨버렸다. "내가 모아두었던 용돈이야. 모자라는 생활비에 보태 쓰면 될 거야." 아, 또 이놈의 입이 문제였다.
비상금.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당신이다. 나는 언제쯤 이놈의 입방정을 단속하면서 돈도 단속할 수 있을까? 남자도 늙으면 딴주머니가 있어야 한다는데 걱정된다.
김정용(포항시 남구 대잠동)
♥ 깜쪽같이 없어진 비상금 하소연도 못해
비상금의 용도는 다양하다. 모으는 데도 그렇고, 쓰는 데도 다양하고, 숨기는 데도 그야말로 비상수단을 써야 한다. 모아두면 분명히 요긴하게는 쓰는데 모으는 방법이 좋아야 한다. 몰래 쓰고 싶을 때, 남편 모르게 아이들에게 필요할 때, 그 밖에 위급할 때에 정말 약방의 감초처럼 잘 쓰인다. 나도 10년 전쯤 비상금이란 걸 모아보았다. 누가 볼세라 어렵게 8만원을 모아서 행거 옷걸이 외투 속에다 숨겼는데 어느 날 조금 더 넣어 두려고 주머니를 만져 보니 감쪽같이 없어졌다. 남편한테 물어볼 수도 없고 아이들은 더더욱 아니고, 아직까지 미궁으로 남아있다.
그 훨씬 이전에도 한번 모았었는데 식당을 하면서 너무 힘이 들었는데 때마침 시주하러 오신 스님께 여쭈었더니 부적을 하나 주시면서 부적값이 9만원이라 하셨다. 많이 힘든 때여서 비상금의 전액을 톡 털어서 7만원을 줘 본 적이 있다. 난 평상시에도 돈을 가지고 다니질 않는다. 조금이라도 넣어 다니면 마당이든 화장실이든 흘리고 다니기가 일쑤다.
솔직히 비상금에 대해서 '있다, 없다'를, 그리고 얼마가 있는지를 밝힐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 글자 그대로 비상금인데. 나도 비상금을 많이 모아보고 싶다. 예전엔 애들 때문에 모으고 싶었고 지금은 남모르는 돈이 있다 생각하면 왠지 마음이 푸근하고 든든할 것 같아서다. 남편은 나 모르는 비상금을 많이 갖고 있다고 생각된다.
돈은 남편이 관리를 하니까 손만 내밀면 언제든지 준다. 만약에 내게 비상금이 있다면 무엇에 쓸까?
비상금을 만들려 해도 쓸 줄을 모른다. 바쁘다는 핑계로 친구도 못 만나고 쇼핑할 시간도 없으니 돈에서 곰팡이가 생기지 않을까 걱정이 된다. 그래도 한번 도전해 볼까?
손해숙(의성군 금성면)
♥혼기 찬 딸에게 조금만 통장 주고 싶어
나에겐 비상금이 없다. 아니 있긴 있었지만 몇 년 전 외국 여행길에 오르면서 남편에게 다 털어 주었다. 혹시라도 외국에서 불상사를 당하면 주인 없이 공중분해될 것 같아 며칠을 망설이다가 통장
째로 내주었는데 통장을 받아든 남편의 표정은 놀랍다 못해 감격해서 말을 잇지 못했다. 그동안 돈 쓸 일이 숱했지만 그럴 때마다 친구에게 빌린 돈이라고 거짓말을 하면서 남편에게 고리를 받아 챙겨 불어난 액수도 비상금 늘리는 데 한몫했다. 많은 돈은 아니지만 그만한 액수를 마련하느라고 나름대로 고생도 했다. 그렇기 때문에 돈이 아쉬워서 남에게 빌릴 지경이 되었어도 그 돈은 염두에 두지 않고 없는 셈 쳐야 했다. 빠듯한 남편 월급을 수십 가닥 내었고 아랫돌 빼서 윗돌 괴며 아슬아슬하게 지켜온 돈이다 보니 차마 손대기가 아까워 장롱 깊숙이 넣어두고 생각날 때마다 꺼내 보며 가슴 뿌듯한 포만감만 맛보았다.
그런데 외국여행을 무사히 마치고 돌아오니 마음이 달라졌다. 아깝고 허전해서 되돌려 달라고 하려니 치사한 것 같고 그냥 있으려니 돈이 눈앞에 아른거려서 며칠을 남편 모르게 끙끙 앓았다.
사실 비상금이라고 해서 쓸 곳이 특별히 있는 것은 아니다. 말 그대로 비상시에 쓸 수 있게끔 비축해 놓는 돈이다. 물론 비상금엔 비밀과 보안이 따르게 마련이다. 남편이 금융계에 근무를 했기 때문에 발각될까 봐 다른 은행을 이용하는 치밀함도 있었지만 이젠 투명하게 드러내 놓았으니 까치발로 은행 드나들 일도 없어졌다. 다시 비상금을 모아 보려고 하지만 좀처럼 붇질 않는다.
혼기에 접어든 딸에게 보란 듯이 내밀 작은 통장 하나만 만들었으면 하는 소원을 가져본다.
이영숙(영주시 휴천2동)
♥모을 때 목적과 달리 사용될 때 많아
남녀를 불문하고 사람이라면 누구나 비상시에 쓸 요량으로 많든 적든 간에 자신만의 비상금을 가지고 있기 마련이다. 그리고 그 비상금이란 것은 당초 모을 때의 목적하던 바와는 달리 엉뚱한 곳에 쓰일 때가 종종 발생한다.
어느 곗날에 "하이고 ○○엄마! 나는 어렵게 모은 비상금을 원수 같은 우리 남편이 사고를 치는 바람에!"하고 푸념을 늘어놓는 어느 아주머니의 말은 어찌 보면 애교스럽기까지 하다.
그런 비상금이란 것이 몇 년간 공을 들인 끝에 내게도 생겼다. 몇몇 친구가 모여 계를 만들고, 또 없는 셈치고 몇 년간 모아온 덕에 제법 묵직한 계금이 모였다. 하여 계원들과 입을 맞추고는 그간 밀린 이런저런 회비를 낼 요량으로 계금을 깨기로 합의하기에 이르렀다. 더불어 거하게 한잔하고 남는 돈은 공평하게 나누기로 했다. 그리고 막상 계금을 깨는 날, 평소에는 가자고 해도 안 오던 마누라가 어째 낌새를 알아차렸는지 숫제 앞장을 서서 떡 하니 등장하더니 "하이고 이게 웬 떡이고! 요건 지난번 당신이 내 비상금 축낸 벌충이요"하고 호들갑을 떤 끝에 인심 한번 쓰는 척 "내 오늘 기분이다. ○○아빠! 요걸로 소주 한잔 하이소"라고 말한 뒤 쥐꼬리만큼 떼어 주고는 홀라당 지갑에 챙겨 넣을 때에는 차라리 허망하기까지 한 돈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내남할 것 없이 뚜렷한 목적 없이 신발 밑창에, 또는 책갈피에 혹은 장판을 뒤집어가며 악착같이 모으는 돈이 비자금, 아니 비상금인 듯싶다. 그리고 그렇게 애면글면 모아온 그 비상금이란 것이 어느 한순간 주인을 배신하여 마누라의 입을 함박 벌어지게 하여 없어질지라도 우리네 남자들은 이곳저곳 비밀 장소에 숨겨서 모아가는 그런 비상금이 있어서 오늘도 남몰래 새실새실 웃으며 살아가고 있는가 싶다.
이원선(대구 수성구 지산2동)
※ 생활의 발견, 작은 감동 등 살아가면서 겪은 경험이나 모임, 행사, 자랑할 일, 주위의 아름다운 이야기, 그리고 사랑을 고백할 일이 있으시면 사진과 함께 보내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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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내실 곳=매일신문 문화체육부 살아가는 이야기 담당자 앞, 또는 weekend@msnet.co.kr
지난주 당첨자=김연희(대구 남구 봉덕3동)
다음 주 글감은 '비상금Ⅱ'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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