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골마다 예초기 돌아가는 소리가 요란하다. 굉음이 산중의 고요를 삼킨다. 전국 곳곳에 흩어져 있던 일가 친척이 모처럼 만에 한자리에 모인다. 조상 무덤을 찾아다니며 묏벌의 잡풀을 깎고 주위의 나무를 벤다. 예초기로 풀을 깎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톱을 들고 나무를 자르거나 갈퀴로 벤 풀을 그러모아 버리는 사람도 있다. 순식간에 묘는 깔끔하게 정리된다. 제물을 진설하고 모두 절을 올린다. 예초기 칼날에 다리를 다치거나 말벌에 쏘여 생명까지 잃을 수도 있지만, 벌초 때면 언제나 전국의 도로는 만원이다. 벌초는 일이라기보다는 숭고한 의식이다. 조상 숭배 사상은 우리 생활에 새겨져 지워지지 않는 문화 기호다.
평촌댁네 마당에는 빨간 고추가 가을 햇살에 몸을 말리고 있다. 평촌댁은 추석을 앞두고 마음이 분주하다. 끝물 고추도 따야 하고 강변 밭의 땅콩도 캐서 손질해야 한다. 구순을 바라보는 시어머니와 필리핀에서 시집온 새 며느리가 있지만, 명절 준비는 온전히 중간 종부인 자신의 몫이다. 한국의 명절 풍습이 낯선 며느리는 그저 시어머니가 시키는 잔일이나 거들 뿐, 제사 음식 준비는 손도 못 댄다. 두 돌 지난 손자는 마당을 아장아장 걷는다. '내가 죽고 나면 며느리와 손자가 조상 제사상에 제삿밥 한 그릇이라도 제대로 올릴 수 있을까',라고 생각하며 작은 한숨을 흘린다. 아들을 통해 대를 잇고, 조상 제사 모시는 일을 중히 여겼던 집안에 외국인 며느리가 들어왔다. 단일민족의 순혈주의는 이제 옛말이 되었다. 바야흐로 우리 사회는 다문화시대로 가고 있다.
젊은 날 교통사고로 남편을 잃은 엄마는 동물병원을 경영하며 억척스럽게 자식을 키우며 살아간다. 아들에게 모든 것을 걸지만, 아들은 엄마의 기대를 배신한다. 딸인 '애자'는 엄마에게 반항하며 사사건건 그와 부딪친다. 그녀는 글재주가 있어 서울의 대학에 특례 입학한다. 글로 성공을 꿈꾸지만, 결국 주류에 편입하지 못한 채 뒷골목에서 방황하며 '깡다구' 하나로 생활한다. 그러나 원수같이 지내오던 모녀는 어머니의 죽음을 앞두고 눈물로 화해한다. '애자'는 엄마를 지켜야겠다는 효심까지 발동한다. 엄마는 공장의 부도를 막아달라며 기대는 아들을 도우려고 자신의 수술을 유보하며 희생을 감수한다. 한국적인 어머니의 전형이다. 모성 신화가 화려하게 꽃을 피운다. 가족은 희생과 사랑의 원천이라는 가족주의가 위력을 발휘하는 순간이다. 영화 이야기다.
김영하의 소설 는 열네 살 먹은 삐딱한 여중생 경선의 눈에 비친 가족 이야기를 담고 있다. 경제적 능력도 없이 폭력만 휘두르는 아버지, 이런 남편을 피해 집을 나가 공사장에서 밥집을 하는 어머니, 아버지에게 죽도록 맞고 지내다가 열여섯 살이 되어 집을 나가버린 오빠가 가족 구성원이다. 그런데 4년 만에 오빠는 열일곱 살쯤 된 여자애를 집안으로 데리고 들어와 동거한다. 힘이 강한 오빠는 아버지를 두들겨 패고 집안 권력을 장악한다. 어머니도 5년 만에 집으로 들어오기로 결정한다. 모처럼 만에 모인 가족은 화목을 다지고자 야유회를 간다. 이 작품은 가족을 자기 희생과 사랑을 바탕으로 하는 관계가 아니라, 경제적 이해관계에 따라 결합하는 기능적 성격의 집단으로 묘사한다. 우리 사회가 직면한 가족 붕괴의 단면을 보여준다.
벌에 쏘이더라도 조상 묘역의 벌초만은 반드시 해야 한다. 그러나 대행업체에 맡기는 가정도 증가하는 추세다. 아버지의 병을 고치려고 자신의 간을 떼어주는 아들도 있다. 그러나 재산 때문에 부모를 폭행하거나 살인까지 저지르는 패륜아의 이야기도 듣는다. 어떻든 혈통주의와 가족주의는 오래된 우리의 문화 기호임이 틀림없다. 이것이 더러 이기적인 폐단을 드러낼 때도 있었다. 하지만, 한국 문화는 서양의 극단적인 이분법과는 달리 이질적인 것을 융합하는 데 익숙하다. 문화는 본질적으로 다양성을 지향한다. 한 측면만을 보고 우리 사회를 진단하는 조급함은 삼가야 한다. 필리핀에서 온 며느리도 곧 조상 제사 모시는 일을 척척 해낼 것이고, 다음해에도 예초기 소리는 온 산천에 울려 퍼질 것이다. 우리에게 아직 조상과 가족은 건재하다.
신재기 문학평론가'경일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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