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천은 교통의 중심도시다. 혁신도시가 그 얼굴을 드러내고 있고, 경부고속철의 거점역도 갖고 있다.
옛날 김천 역시 사람이 모이고, 물류가 오간 곳이었다. 영남의 3대 관문인 추풍령을 가진 김천은 조선 세종 때 전국 44개 역도(驛道), 538개 속역(屬驛)체제의 핵심 역도였다. 역도의 수장인 찰방은 통상 종 8품이었으나 김천도는 그 중요성을 감안해 종 6품에 달했다. 세종 때 김천도의 속역은 17개였다. 더욱이 대구의 일부 속역도 김천도 소속이었다는 사실이다. 추풍역, 문산역, 부상역, 양천역, 작내역, 장곡역 등 김천지역 6개역을 비롯해 지금의 성주, 구미, 고령을 거쳐 대구 범어, 달성 하빈의 속역은 김천도 소속이었다. 김천도는 세조 때 경남 함양과 거창, 합천 지역의 역까지 포함한 21개역을 관할하기에 이르고, 조선 중기 영조 때 19개, 19세기 말까지 20개의 속역을 거느리는 지위를 유지해 왔다.
김천역지에 따르면 김천도의 속역인 김천역은 지금의 시내 남산공원과 김천초등학교 인근에 위치했고, 찰방과 역장 각 1명에 역리와 역졸이 693명, 역노(남자종) 316명, 역비(여자종) 151명 등이 종사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속역 하나의 규모가 얼마나 컸는지 엿볼 수 있다.
김천찰방을 지낸 인물들 중엔 우리나라 최고의 지리서인 '택리지'의 저자 이중환도 있었다. 김천찰방은 이중환의 마지막 관직이었다. 이중환은 경종 2년(1722년) 당시 노론 관료들이 임금을 독살했다는 지관 목호룡의 고변사건에 연루됐다. 이중환의 연루는 김천찰방 재임 시 목호룡이 김천역에서 말을 타고 갔다는 게 그 빌미였다. 이중환은 목호룡이 끝까지 말을 훔쳐간 것이라고 주장해 목숨을 겨우 건졌고, 이후 유배지에서 풀려나 당쟁이 없는 살기좋은 곳을 찾기 위해 전국을 유랑했고, 그 결과 택리지라는 역작을 낳았다. 어찌 보면 김천이 이중환의 역작 탄생에 기여했다고나 할까.
역이 발달하면 자연 큰 시장도 서게 마련이다. 시장이 발달하게 되는 18세기부터 1900년대 초까지만 해도 김천장은 평양, 개성, 강경, 대구와 함께 조선 5대 시장이었다. 김천장은 지금의 용두동 일대의 감천모래밭 대부분이 장터로 이용됐다. 성주(동) 황간(서) 거창(남) 상주(북) 등 각 방면의 물류가 모이고 흩어지는 그 중심이 바로 김천장인 것이다. 김천장의 가장 많은 거래 품목은 바로 소였다. 김천장에서 소가 얼마나 많이 거래됐기에 소가죽을 전국에서 가장 많이 거래하는 김기진이라는 우피거상(牛皮巨商)이 출현할 정도였다.
소 다음 차지는 수산물이었다. 김천은 내륙지방이지만 뛰어난 수운(水運)을 갖고 있었다. 바로 낙동강이다. 남해안에서 잡힌 어류는 낙동강을 따라 중·상류지방까지 올라온 뒤 김천의 젖줄이자 낙동강 지류인 감천을 거슬러 용두동의 모래밭에서 수산물을 내리고 실었다. 수산물은 시장에서 다시 가공(염장)을 한 뒤 전라도와 충청도, 경상도의 내륙지방으로 공급됐다. 김천장은 일제 강점기에는 전국 3대 시장으로까지 명성을 높였다. 하지만 김천장은 '현대'라는 신문물이 들어오면서 '도로'라는 강력한 경쟁자에게 밀려 그 명맥을 다하고 만다.
이종규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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