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의 발견, 작은 감동 등 살아가면서 겪은 경험이나 모임, 행사, 자랑할 일, 주위의 아름다운 이야기, 그리고 사랑을 고백할 일이 있으시면 사진과 함께 보내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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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 당첨자=안순이(대구 수성구 신매동)
다음 주 글감은 '가을산행'입니다
♥늦은 귀가에 남편은 토끼눈을 하고
3년 전 10월 어느 날, 오후 5시 즈음에 동생한테서 전화를 받았다. 친구들이 빨리 언니한테 연락하여 얼굴 좀 보자고 한다고. 갑자기 받은 전화라 기분도 이상했을뿐더러 가슴이 뛰었다. 몇몇이 바꿔가며 전화 통화도 하였다. 정말 몇 년 만의 그리운 얼굴들인가? 13살에 졸업하여 50살이 되었으니 37년이란 긴 세월이 흘렀는데 얼굴들이나 기억을 하려나? 그날은 그렇게 대충 변명만 하고 그냥 넘어갔다.
이젠 전화 번호도 알았겠다. 몇 번이나 연락을 받았다. 맘속으로 총동창회 모임 때 꼭 친구들 만나러 가리라 생각하던 중 연락이 왔다. 행사장으로 향하는 내내 어릴 적 친구들과 학교 교정 또는 동산에서 뛰어놀던 생각이 났다.
왜 그렇게 걸음걸이도 빠르게 걸어갔던지 도착하여 친구들 얼굴을 보니 어릴 때의 그 모습, 그대로인 것 같아 더욱 기억이 새로웠다. 총동창회 행사가 끝나고 동기들만 따로 또 모임을 가졌다. 그렇게 옛날 이야기로 꽃을 피우다 보니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수다를 떨고 집에 오니 새벽 2시가 되었다. 남편은 평소 그렇게 늦게 다니질 않는 사람이 집에 오질 않으니 올 때까지 기다리느라 토끼눈을 하고 있었다. 미안하기도 했지만 처음이고 앞으로 그렇게 늦을 일 없다는 생각에 그 미안함도 잠시였다. 그 후 몇 번의 만남을 더 가졌는데 수다와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 놓으면 시간 가는 줄 모르니 몇 번이고 새벽에 들어 왔어야 했다. 조금은 시끄러웠지만 무난히 넘어갔다.
물론 친구들 만나는 것도 중요하지만 특히 어릴 때 모교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됐으면 하는 마음에 결식아동 또는 장학재단에 기부를 빠트리지 않고 하고 있는 데 대해 자부심을 느낀다. 얼굴 중 눈, 코, 입 얼굴형 등 크게 변함없이 자라준(?), 아니 늙어가는(?) 친구들의 모습을 생각하니 웃음이 절로 나온다. 그리고 각자 맡은 일 열심히 하며 살아가는 모습들이 참 예뻐 보인다. 어릴 적 그 맘 그대로 변치 않은 마음들, 또 힘들 때 도움이 될 수 있는 친구들이 되길 노력한다. 그래! 모두들 건강 유의하고 또 의미 있는 삶을 살아가길 바라자. 친구들 파이팅!
김금숙(대구 남구 봉덕3동)
♥3년 전부터는 1박2일 바닷가 피서
낙동강변 기름진 들판에 자리 잡았던 오설(烏舌)초등학교를 졸업한 지도 44년의 세월이 흘렀다. 3개 마을 50여명이 한 반이 되어 졸업까지 갔으니 우리는 한 형제자매와도 같았다. 겨울철 솔방울 따서 난로 피우고 눈이 내리는 날엔 전교생이 동원되던 산토끼몰이, 낙동강에서 선생님과 함께 한 강수욕, 10리 길 도동서원은 단골 소풍장소였다.
7년 전부터 결성된 우리 동기회는 어느 기수보다 잘 되고 있어 모두들 부러워한다.
1년에 봄가을로 열리는 동창회에는 대구의 친구들이 주축이 되고 서울, 대전, 포항, 울산, 양산, 부산, 현풍 등에서 친구들이 모인다. 3년 전부터는 1박2일의 바닷가 피서 모임도 해마다 가지고 있다. 학교는 12년 전 폐교되고 3년 전 침수위험지대로 건물마저 철거되고 없다. 지금은 교정을 지키던 플라타너스와 해송 나무만 쓸쓸히 지키고 있다. 농촌개발 사업으로 거듭나고 있는 고향마을 학교터에 잔디가 심어지고 체육 공간으로 정비되고 나서 총동창회를 개최할 그날을 기대해본다.
곽정섭(대구 서구 내당동)
♥검정 고무신, 빡빡머리들이 벌써∼
지금은 어디에서 살고 있을까? 보고파라. 보고파라. 나의 동창생!
수많은 세월이 지난 지금은 입가에 주름살이 그 얼마나 피었을까? 1970년도에 유행하던 동창생이란 대중가요 가사처럼 수많은 세월이 흘러서 손자손녀에게 할머니 할아버지 호칭을 들을 나의 초등 동기동창생들.
왠지 그저 보고파집니다. 더구나 요즘처럼 오곡백과가 무르익는 결실의 계절엔 더욱더 그리워집니다. 1960년대 초등학교에 다닌 우리처럼 50대 중반의 동창생들은 지지리도 춥고 배고팠던 산골 소년 소녀들이었습니다.
검정 고무신, 빡빡머리에 어깨에 책보자기 둘러메고 산길과 하천 길을 뛰어다니면서 미꾸라지도 잡고 메뚜기도 잡던 코흘리개 시절에 하천제방에서 풀 뜯는 암소 등을 타고 집으로 오곤 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까마득한 옛날 이야기 같습니다.
전국에 흩어져서 살다 보니 동창생들이 부산과 서울의 중간지점에 장소를 정하여 1년에 한번 정기 동창회 모임을 통해서 그간의 쌓였던 회포를 풉니다.
6년을 한 학급에서 함께 공부했었는데 언제나 나에게는 천사 같은 그리움의 대상인 소녀가 있었습니다. 지금은 남의 부인이며 젊은 시어머니가 되어 있겠지만 나에겐 아직도 첫사랑의 여인으로 남아 있는 친구 미자! 어릴 적 무작정 좋았던 그녀의 모습을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합니다. "미자야! 네가 있어서 행복했고 동창회 모임이 있어 즐겁다."
1998년 폐교되고 없지만 작승초등학교 제16회 동창생 파이팅!
김경환(대구 북구 구암동)
♥동창 우리 부부는 "한 쌍의 바퀴벌레"
우리 부부에게는 별명이 있다. '환상적인 한 쌍의 바퀴벌레'. 둘 다 조금은 웃기는 면이 많은데다가, 죽이 척척 맞으니 친구들이 붙여준 별명이다. 남편과 나는 동창이다. 그래서 6개월에 한번씩 있는 지역 동창회에도 두 손을 꼭 잡고 참석한다. 그래야만 동창회비가 1만원 할인되기 때문이다. 그날도 동창회가 있는 날인데 비도 오고 바람까지 엄청나게 불어댔다.
동창회를 하기로 한 식당에는 약속 시간이 되어도 아무도 오지 않았다. 모두 모이면 열 명이 조금 넘는 모임인데 우리 부부만 덩그러니 앉아 있어야 했다. 친구들에게 전화를 하니 하나같이 변명이 많다. 결국 총무를 맡은 나는 남편에게만 동창회비를 받고 장부를 접어야 했다. 그냥 일어서기에는 시켜놓은 음식이 너무 많았고, 돈도 아까워 다 먹고 가기로 했다.
집에서야 남편이니 깍듯이 존대를 하지만 동창회라는 자리 때문에 내 말은 친구간의 말투가 되어 수다스러워졌다. 학창 시절, 친구들 이야기를 하며 수다를 떠는 중 우리는 부부간에 할 수 있는 스킨십 섞인 장난도 하며 술잔을 비워갔다.
우리는 집에서 하듯이 반찬도 서로 먹여주고 '오늘 예쁘네' '너도 멋진데 뭘' 하는 양념도 빠뜨리지 않았다. 손님들이 우리를 흘끗흘끗 보는 것을 알았지만 우린 부부지간에 할 수 있는 이야기라 생각하며 개의치 않았다.
음식을 어느 정도 소화시켰다 싶을 때쯤에 남편이 내 손을 잡으며 한 말이 도화선이 되었다. "이제 그만 집에 가자. 오랜만에 니 안고 잠이나 자야겠다." 그때였다. 옆 좌석에 있던 아주머니 한 분이 화를 내며 일어나는 거였다.
"보소. 이제껏 보자 보자 하니 너무 하는 거 아닌교. 가만히 얘기를 들어보니 동창인 것 같은데 와 그라는교?" 우리 부부는 무슨 영문인지 몰라 엉거주춤 서 있는데 연타로 야단이 들어왔다. "둘이서 동창회를 하든 말든 잠은 왜 같이 자는교? 대답해 보소? 나이도 보이 좀 있어 보이는데 가정 가진 사람들이 그라먼 안 되지요. 동창끼리 바람난다더니 내가 그 꼴을 직접 보네." 그제야 우리는 사람들이 우리를 불륜남녀로 봤다는 것을 눈치 챌 수 있었다.
결국 그날의 동창회는 불륜남녀의 밀회장이 된 셈이었다. 그날의 동창회가 끝난 후로 나는 동창회를 하더라도 남편에게 절대 반말을 쓰지 않게 되었다. 졸지에 여자 친구들은 내게 별명 하나를 또 붙여놓았다. '여권신장의 절대 악'이라고.
박혜균(포항시 북구 용흥동)
♥벌써 십여 명은 유명을 달리해
연말이 가까워 오면 동창회로 술렁이게 된다. 초등학교서부터 대학까지 동창회가 여럿 있지만 정이 가기로 치면 초등학교가 제일일 성싶다.
동창회 연락을 위해 전화를 할 때 여성일수록 마중물을 보내 대화 물꼬를 트는데 한 여자 친구는 내 얘기를 한참 듣더니 대뜸 "니, 창호 맞제?"라며 크게 소리쳐 깜짝 놀랐다.
창호! 이 얼마나 오랜만에 들어보는 내 소싯적 이름인가. 초등학교 다닐 무렵 호적에 등재된 이름과는 별도로 마을에서만 불리던 이름이 있었다. 그런 옛 이름을 기억해 주는 사람은 여태 아무도 없었다. 잊은 이름을 다시 찾은 기쁨에 나는 환호성을 올렸다.
"니 참 고맙다. 우째 그리도 내 이름을 잘 기억하노? 니캉 내캉 둘이 있을 때만 그렇게 부르지 말고 다른 친구들이 있을 때도 꼭 그래 불러 도고, 알겠제."
전국 각지에서 흩어져 살아오던 오십 명 조금 넘는 동기생 중 십여 명은 벌써 유명을 달리했다. 이제는 우리들의 인생보다는 자녀들에게 기우는 무게를 어찌할 수 없는 오십 줄의 동창생들이다.
성병조(대구 달서구 상인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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