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토요갤러리] 흰 바탕 위의 흰 사각형

더 이상 그릴 수 없는 절대주의 회화의 종착점

제목: 흰 바탕 위의 흰 사각형

작가: 카지미르 말레비치(Kasimir Malevitch 1878~1935)

제작연도: 1918년

재료: 캔버스 위에 유채

크기: 79.4 × 79.4㎝

소재지: 미국, 뉴욕, 현대미술관

절대주의는 말레비치라는 한 개인의 철학적 사고 위에 기초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신지학에 기초한 그의 세계관에 의하면 리얼리티는 자연과학적 관찰에 의해서는 파악되지 않는 존재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철학적 사고가 작품 안에서 어떻게 구체화되는가? 그가 '절대'(絶對·Supreme)라고 명명하고, 화폭 위에 구현하고자 하였던 리얼리티는 유일무이한 리얼리티이자 내면적, 정신적 리얼리티, 즉 관념의 리얼리티이다. 이 리얼리티는 회화상에서 외계의 방해에서 벗어난 순수회화로 구체화된다. 따라서 순수회화와 리얼리티는 동질(同質), 동가치(同價値)의 관계를 가지게 되는데, 이 때 비로소 회화는 완벽하게 자율적이 되며, 외계의 형상을 빌리지 않고 우주와 직접적인 관계를 가진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전통적으로 무(無)에 대한 열광적인 관심이 존재한다. 말레비치의 리얼리티는 비물질적 존재이므로 감각의 차원에서는 무가 되며 이 무는 회화상에서 '비어있음'으로 구체화된다. 말레비치가 '제로(Zero)의 상태'라고 부른 이 '비어 있음'은 동양화에서의 '그려지지 않고 남겨진 흰 부분'이라는 의미를 지닌 여백(餘白)과는 분명히 구분되는 것이다. 회화상에서의 이 '비어 있음'은 모든 존재가 소멸한 제로의 상태인 동시에 또한 어떠한 한정(限定)도 없으며, 모든 가능성을 내포한 무한(無限)의 상태이기도 하다. 즉 이것에 의거해 모든 존재가 탄생하고 존립하는 근원으로서의 절대적인 실재(實在)이기도 하다는 의미이다.

무에 대한 이러한 그의 사상은 노장사상(老莊思想), 또는 문인화의 그것과 놀랍도록 유사하며, 현 세계의 붕괴와 새로운 세계의 등장을 기대하는 미래주의의 직관과도 깊은 관련이 있다. 그는 1914년의 1차 대전과 1917년의 소련혁명은 현 세계의 붕괴를 재촉하는 사건으로 보았으며, 이 붕괴로부터 새로운 문화가 탄생할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결국 단적으로 말하자면 말레비치의 절대주의 작품은 일종의 조합, 즉 정치 사회적 분위기와 철학적 논리, 그리고 조형적 연구가 결합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듯 치밀하게 정리된 그의 예술관은 실제 작업이 나아갈 방향을 미리 엄격하게 설정하고 변화를 제한하며, 그 변화의 종착점 또한 분명하게 설정하는 결과를 낳게 된다. 즉 1913년의 '흰 바탕 위의 검은 사각형'에서 출발하여, 이후 몇 년간 다양한 종류의 색채실험을 거친 다음, 1918년 마침내 형과 색이 모두 제로의 상태로 환원하는 이 작품에 이르기까지의 예술적 여정은 미리 짜인 각본에 의한 것처럼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수순을 밟고 있다. 사각형이 어렴풋이 드러나는 이 작품은 물론 완전한 제로의 상태에 도달한 것이 아니다. 구체적인 물질을 매개로 하는 시각예술인 미술에서 완전한 제로의 상태는 바로 '회화 없음', 즉 회화의 부재를 의미하는 것이라고 생각한 말레비치에게는 제로에 무한 접근하는 리미트 제로(∞0)가 바로 절대주의 회화의 종착점이었다. 이제 그는 자신의 절대주의 예술론을 부정하지 않는 한 더 이상 아무 것도 그릴 수 없게 되는 상황에 처하게 된다.

권기준 대구사이버대 미술치료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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