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송재학의 시와 함께] 「말빚」/이희중

그때 내게 말했어야 했다

내가 그 책들을 읽으려 할 때

그 산을 오르기 위해 먼 길을 떠날 때

그 사람들과 어울릴 때

곁에서 당신들은 보기만 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내 삶은 결국 내가 그 책을 읽은 후 어두워졌고

그 산을 오르내리며 용렬해졌으며

그 사람들을 만나며 비루해졌다

그때 덜 자란 나는 누구에겐가 기대야 했고

그런 내게 당신들은 도리 없는 범례였다 그러므로

누군가가 내게 그 말을 해야 했다면,

누구한테선가 내가 그 말을 들어야 했다면

그 누구는 필경 당신들 중 하나였다 그러나 당신들은 늘

말을 아꼈고 지혜를 아꼈고 사랑과 겸허의 눈빛조차 아꼈고

당신들의 행동 때문에 고통받는 사람들한테도

謝過와 謝罪의 말 없이 침묵하였다

당신들에게 듣지 못한 말 때문에 내 몸속에서는 불이 자랐다

이제 말하라, 수많은 그때 당신들이 내게 해야 했던,

그때 하지 않음으로써 그 순간들을 흑백의 풍경으로 얼어붙게 한

그 하찮은 일상의 말들을 더 늦기 전에 내게 하라

아직도 내 잠자리를 평온하게 할 것은,

내가 간절히 듣고 싶었으나 당신들이 한사코 하지 않은 그 말뿐

이제 말하라고 시인은 채근한다. 나지막히, 단호하게, 매섭게 당신들이 말하지 못했던 침묵에 대해 말하라고, 목소리에 날을 세운다. 사과와 사죄도 없이 당신들의 침묵은 길어진다고, 그 목소리는 낮지만 절규이고, 조용하지만 우레이다. 우리가 말하지 못했던 침묵의 페이지들을 생각해보면 이 시는 반성을 요구한다.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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