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은 우리 선조들이 기대 살아 온 언덕이다. 그 기슭을 훑어 먹을거리를 장만하고 소를 몰아 그 골짜기를 일궜다. 산줄기를 뒤져 땔감을 묶었으며 등성이를 넘어 이웃마을로 나들이했다. 자연스레 산에는 그 생활사가 배이고 고개마다에는 숱한 사연이 쌓였다.
물이라고 다르지 않았다. 산줄기 사이 물길은 바로 산의 일부이자 그와 동일체였다. 산이 없으면 골이 있을 수 없고, 물이 없으면 산이 저렇게 갈라지지 않았을 것이다. 산이 물이요 물이 곧 산이다. 선사(禪師)들은 예로부터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라고 일깨웠으나, 그 또한 둘의 분별을 가르치는 목소리는 아니었다.
합쳐 함께 선조들 삶의 일부가 되고 바탕이 된 산과 물은, 사람들의 생활권을 가르고 혼인권역을 구획 지었다. 큰 산줄기는 그 양편 사람들로 하여금 서로 다른 방언을 쓰게 만들고 노래까지 서로 다른 걸 부르게 했다. 고지도(古地圖)가 도시들은 조그맣게 그리면서 산과 물을 부각시켜 주목한 연유가 짐작될 듯하다.
산줄기 물줄기가 저렇게 중요한 것임을 우리 선조들은 진작 알았다. 신라시대부터 그랬고 고려 때는 더 했다. 700년도 더 전에 씌어진 '파한집'(破閑集)에서 이인로(李仁老)는 벌써 "지리산의 산맥은 백두산에서 시작된다"고 썼다. 백두대간(白頭大幹)적 인식에 다름 아니다.
그러나 전통적 산수(山水) 인식의 틀은 현대 들면서 뭉개졌다. 일제(日帝) 학자들은 눈에 보이는 산줄기를 내팽개치고 그 밑에 깔려 있을 지질(地質)과 광맥구조로 관심을 옮겨갔다. 땅 위의 산줄기가 아니라 땅 밑 흐름을 주제로 이 땅의 '산맥' 그림을 그렸다. 그 '산맥'은 광복 이후에도 학교를 통해 우리 뇌리에 요지부동하게 심어졌다.
거기다 시간이 흐르면서 세상마저 엄청나게 바뀌었다. 사통팔달 도로가 뚫리고 자동차가 흔해졌다. 산줄기의 위력이 더 위축됐다. 이제 더 이상 우리 생활권을 구획 짓지 못하게 됐다. 산줄기를 쳐다 볼 사람이 더더욱 줄어들게 된 것이다.
그러나 모두 알듯, 사람이 물질적 존재만은 결코 아니다. 정신과 영혼을 못잖게 소중히 하기에 사람이다. 산줄기에 대해서도 그랬다. 우리 산줄기는 그냥 산이 아니라 바로 나의 일부이고 우리의 몸체임을 다시 생각하기 시작했다. 바로 거기에 우리 수천 년 생활사가 배어 있음을 다시 깨우치기 시작했다.
그 처음이 1990년 무렵이었다. 올해로 만 20년 전이다. 전통 산줄기 인식을 되찾자는 운동이 벌어졌다. 백두대간이니 무슨 정맥이니 하는 주요 산줄기를 종주(縱走) 답사하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그리고 드디어 2005년에는 국토연구원이 옛 지리인식을 되살린 '새 산맥지도'를 내놨다.
'내 영혼이 따뜻했던 날들'이라는 소설 속 인디언 할아버지가 들었어도 크게 손뼉 칠 일이다. 그는 무엇이든 '이해'가 선행된 다음에야 사랑이 생길 수 있다고 했다. 우리 땅도 그럴 것이다. 큰 산줄기를 걸어 나라에 대한 이해를 높이고 구역 경계를 걸어 자신이 사는 시·군 사랑을 키우는 산꾼이 늘어난 일, 이건 근년 이 나라에 나타난 틀림없이 좋은 징조 중 하나다.
하지만 그것으로 모든 게 다 풀린 건 아니었다. 그건 여전히 조짐이기만 할 뿐, 현장은 더 심각한 상황 속으로 멈춤 없이 빠져들기 때문이다. 전통 지리인식의 부활이 늦어져 그 발길 손길이 채 미치기 전에, 산줄기에 배어 온 우리 생활사가 순식간에 풍화(風化)돼 버릴 위기가 깊어지는 것이다.
다름 아니라, 그 땅의 이름들과 사연과 생활사를 전승해 줄 산사람들이 사라져 가고 있다는 말이다. 그 산을 지키고 살던 사람들 중 상당수는 이미 진작 도시로 옮겨갔다. 남은 사람들은 연로해졌다. 그리고 할아버지로부터 이야기를 들어 전승할 다음 세대는 이제 태어나지 않는다. 산줄기에 쌓여 온 우리의 생활사는 이래서 공중으로 흩날리고 땅속으로 묻혀들 위기에 처하는 것이다.
물론 그곳 삶의 흔적들에 대한 보존 노력이 전혀 없는 바는 아니다. 전설과 민담이 채집되고 일부 지명이 '마을지'라는 책으로 정리된다. 산과 재 이름 또한 '국토지리정보원'이 만드는 국가 공식 지도를 통해 전승되기도 한다. 동네사람이 줄어드는 대신 멀리서 찾아오는 낯선 등산객들이 그곳 지명을 전파하는 수도 있다.
하지만 어느 것도 충분하지 못하다. 명색이 국가가 만드는 지도마저 엉터리 지명을 써넣어 두기 일쑤다. 등산객들은 본의 아니게 그 잘못된 이름을 퍼뜨리는 악역을 맡는다. 마을지들은 산줄기 지도를 그릴 줄 몰라 가리키려는 게 어느 것인지 제대로 지목해 내지 못한다. 거기다 널리 유통되지 못하니 더 무력하다.
그러는 사이 시간은 자꾸 흘러간다. 산줄기에 얽힌 우리의 생활사를 제대로 들어 둘 기회가 자꾸 줄어든다. 지금 당장 서두르지 않으면 그 귀중한 자료들이 영원히 소멸돼 버릴 수 있다.
시리즈 '雲門(운문)서 華岳(화악)까지'는, 그 산줄기를 밟아 먼저 그것에 대한 '이해'를 키우고, 나아가서는 거기 배어 있는 삶의 흔적들을 기록해 두려는 기획이다. 매일신문의 2005년 연간 연재물 '八公山河'(팔공산하)와 취지를 같이한다. 그때는 팔공산이 그려내는 대구 북동부, 영천 서부, 군위 남부, 칠곡 등의 지형과 거기 배인 생활사가 관심사였다.
이번 대상은 경북 남부 구간 낙동정맥과 거기서 갈라져 나가는 비슬기맥 일대다. 시리즈 제목상의 '운문'은 낙동정맥 경북 구간 최남단 가지산에서 이어지는 운문산(雲門山)이다. '화악'은 비슬기맥의 끝자락에 솟은 밀양-청도 갈림선의 화악산(華岳山)이다.
하지만 일을 짊어지고 산으로 들어서기는 늘 두렵다. 자유로 등산배낭 메고 나설 때는 맞닥뜨릴 리 없는 무거움이다. 산은 인간이 훤히 들여다보기에 너무 넓은 터전인 탓이다. 거기 기대어 온 사람살이, 수백 년 아니 수천 년 켜켜이 쌓인 그 삶의 나이테가 도무지 짐작의 범위를 벗어나는 것인 탓이다.
실제로 산에서는 여러 날을 쉼 없이 걷고도 거두는 바 없이 헛돌 때가 있다. 그런 날은 회의가 특히 칼날같이 심장을 콱콱 베어 내린다. 이게 과연 가능한 일일까, 자동차 세상, 도로 세상에 산줄기·재 이야기가 당키나 할까…. 5년 전 '팔공산하'를 취재할 때도 그랬다.
그 신산함을 다시 부둥켜안고 또 길을 나선다. 날이 차고 산길이 외롭지만 어떻든 지금 하지 않으면 안 될 일이라 믿기 때문이다. 비록 건지는 게 적더라도 한번 속 시원히 걸어 보기라도 하자는 심사다. 특정 누굴 위한 일이 아니라 우리 모두를 위한 일이고 우리 선조들을 생각하는 일이며 우리 후손을 위한 일이라 믿기 때문이다. 이 땅의 산들을 읽어 두고 이야기 들어 놓는 일은 이 땅의 '매일신문'이 앞으로도 해 나갈 과제라 믿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건 결코 혼자 해낼 수 없는 일이다. 같은 산천에 사는 우리 모두 힘을 합쳐야만 성과를 낼 수 있을까 말까 한 일이다. 누구보다 산 밑에 사는 많은 이들이 공감하고 동참해 줘야 가능하다. 그곳과 인연 맺은 많은 사람들이 함께 걸어줘야 이룰 수 있다. 그러리라 믿고 일년간 이어질 짧지 않은 길을 나선다.
글·박종봉 편집위원
사진·정우용 특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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