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에 문화체육관광부의 용역을 수행한다는 정부 산하 모 연구소의 연구원이 전화를 걸어왔다. 원효 순례길을 연구하고 있다며 원효와 관련이 있는 팔공산의 사찰에 대해 묻고 어떤 프로그램이 가능할지에 대해서도 이야기하며 꽤 긴 시간 이야기를 나누었다.
하지만 경주에서 평택까지 이어진다는 그 긴 길에 대해 필자는 우려를 표명하지 않을 수 없었다. 최근 들어 전국적으로 '걷는 길' 만드는 일이 붐을 이루고 있지만 지금과 같은 방식으로는 실패하기 쉽다. 돈이 너무 많이 들고 지역민의 자발성이 빠져있기 때문이다. 지금 중앙정부와 지방자치단체에서 만들려는 길은 물류를 실어 나르기 위한 길이 아니라 자신을 돌아보기 위한 여행의 길이다. 목적이 다른 길이면 만들어가는 방식도 달라야 한다. 결국 도로 만들 듯이 사업을 하면 예산 낭비가 될 가능성이 크다. 우리 지역의 숨어 있는 걷기 좋은 길들을 찾아내어 소개하고 하나 둘 다니다 입소문이 나면 비로소 살아있는 길이 된다.
필자가 일하는 단체에서는 제주 올레가 지금과 같은 유명세를 타기 전인 초창기부터 제주 올레와 교류를 하며 대구에도 제주 올레와 같은 걷는 길을 만들어 가기로 약속했고 그 사업을 지금까지 계속해 오고 있다. 제주 올레는 길에서 평화를 얻은 한 사람이 보다 많은 사람들과 평화를 나누고 싶어 시작하게 되었다. 자신이 체험한, 스페인과 프랑스의 접경지대에 있는 순례자의 길까지 가지 못하는 이들을 위해 자신의 고향에서 시작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우리 땅의 길에서 평화를 얻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대구에서도 제주까지 가지 못하는 이들을 위해 팔공산 올레와 대구 올레를 만들어 소개하고 있다. 걷는 일이 시민의 일상이 되면 도시의 모습도 많이 바뀔 가능성이 높다. 느리게 걷는다는 것은 자신을 돌아보고 주위를 돌아볼 마음의 여유를 찾는 일이기 때문이다. 또한 걷는 이들은 되도록 훼손되지 않은 자연 그대로의 모습을 좋아한다.
그러면 제주 올레는 어떻게 성공할 수 있었을까? 내가 본 제주 올레는 권력, 자본, 언론의 힘이 아닌 신념과 의지를 가진 개인들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성공한 것이다. 우리 지역이 그렇게 원하는 중앙정부나 대기업의 지원 없이 제주의 관광산업을 시작한 지 2년 만에 활성화시켰다.
250만명이 사는 대구에는 그런 신념과 의지를 지닌 헌신적인 개인들이 없을까? 단언컨대 있다. 그런데 그들을 서울로 떠나보내는 묘한 힘이 이 도시에는 있다. 독립영화인들이 그러했고 인디 음악인들이 그러했으며 최근에는 녹색평론이라는 잡지사가 그러했다. 아마 내가 모르는 많은 이들이 그렇게 쓸쓸히 이 도시를 떠났으리라.
여기에서 우리는 이제 외부에만 눈을 돌릴 것이 아니라 지역 산업의 비전을 만드는 일과 사업 성공의 요건을 짚어보아야 한다. 우선 민과 관의 역할 분담이 정확해야 한다. 민(民)의 강점은 효율성과 창의성에서 찾을 수 있다. 관(官)은 집행의 투명성과 행정적 파급력을 가지고 있다. 관은 민의 효율성과 창의성을 훼손하지 않는 범위에서 투명하게 집행되도록 관리하고 행정적 지원을 해야 한다. 그러한 사업은 반드시 성공하게 되어 있다. 그리고 관(官)은 눈을 크게 떠야 한다. 도시 구석구석에서 헌신적으로 일하는 개인들을 찾아내고 그들을 다각도에서 지원해야 한다. 그래야 비전이 있는 개인들이 이 도시에 터를 잡게 된다.
다음으로 도시의 경쟁력을 갖추기 위해 외부적 요소에 의존하지 말아야 한다. 대기업이 와주고 중앙정부가 팍팍 밀어주면 더할 나위 없이 좋다. 하지만 전국 지자체가 다 같은 마음으로 그 일에 매달리고 있다. 우리는 발상을 바꿔 우리의 내재적 힘을 길러야 한다. 제주 올레는 중앙정부의 지원이나 대기업의 지원 없이 개인들의 헌신적 노력만으로 제주의 관광산업 판도를 바꿔 놓았다. 결국 대기업이 제주 올레를 지원하고 싶어하고 중앙정부도 돕고 싶어한다. 비전 있는 개인들의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지원해서 도시가 기운이 넘쳐나면 외부적 요소가 없어도 희망찬 도시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제주 올레의 성공은 운 좋은 개인에게 있을 수도 있다. 거기에서 우리는 운이 우리를 찾아오게 하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 사람을 키우자! 이 도시를 거대한 인큐베이터로 만들자. 그리고 우리 스스로 도시의 비전을 만들어야 한다. 민관의 절묘한 협력을 통해!
안재홍 대구녹색소비자연대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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