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상작품이라고 해서 화면에 보이는 것만으로 그 작품을 다 이해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비구상 미술을 대할 때 더 많이 배후의 이면을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배경의 어떤 형이상학적인 의미도 시각을 통해 전달되는 감각적인 표현에 뒤따르는 하나의 해석에 지나지 않는다. 매우 지적인 작품으로 느껴지는 정점식의 이 그림도 매력의 근원은 결국 참신한 시각적인 인상 바로 그것에서 기인한다.
단아하고 간결한 이미지의 이 그림을 우선 기호론적 관점에서 살펴보자면 인체의 형상에서 추상화된 두 형태와 하나의 작은 원과 화면 한쪽 모서리에 꺾쇠 모양의 직각이 알아 볼 수 있는 구성 내용의 거의 전부다. 기하학적인 형태에 가깝도록 극도로 축약된 유기적이던 원래의 모양은 서 있는 남녀 두 명의 인물상으로 생각하게 한다. 바탕은 흰 물감을 두터운 층이 지도록 공들여 칠했는데 마티에르를 부각시키려는 의도가 분명하다. 또한 청색의 선적인 인물 형태에 배경이 되는 공간으로 지각되며 매우 세련된 색감의 대비로 평온한 조화를 지향하고 있다.
모든 시각예술이 다 그렇지만 이런 그림을 작은 도판을 통해 보고 얻을 수 있는 것은 별로 없다. 사진만을 놓고 판단하면 형태의 단순한 구조나 색채의 신중한 고려만 생각하기 쉽지만 실제 작품 앞에서는 전혀 다른 경험을 하게 된다. 미술관의 수장고에서 포장에 싸여있던 이 작품의 개봉을 지켜보다가 익히 알고 있다고 생각하던 것과 달리 순수한 형식미 같은 것을 본 순간 숨이 멎는 것 같은 감격을 느낀 적이 있다. 물론 여러 가지 정황이 그런 분위기를 조성했지만. 그 정황에는 다름 아닌 우리 근대미술의 전개 역사와 이 작품의 소장 내력 그리고 한 작가의 생애와 삶에 대한 견해가 작용했을 수 있다.
전후의 대구에서 우리 근대미술이 어떻게 이 정도로 정일하고 밀도 높은 추상화로 나아갈 수 있었는지. 한국의 모던아트 운동이 막 시작되려던 시점에 또 무엇보다 기량 면에서 이렇게 완성도 높은 미학적 성취가 가능했는지 모든 상황을 감안하면 자연 감동은 더욱 커질 수밖에 없다.
이 그림은 흰색 바탕에 짙은 청색을 사용한 단색에 가까운 색채 사용이 그림의 인상을 한층 냉철하고 이지적으로 만들었다. 형상과 공간의 비례에서 균형감이 빚어낸 이상적인 조화나 표현의 절제 등 조형적 통제력이 아주 돋보이는 한국 추상미술의 역사에서 거의 기념비적인 작품으로 생각된다. 실루엣이라는 제목과 달리 모뉴멘탈한 그림의 인상은 당시로서는 진보적이며 혁신적인 추상미술의 정신이 승리를 앞둔 모습으로 당당하게 서 있는 듯 보인다.
김영동(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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