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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웃사랑] 간암 앓는 이경준씨…사채가 가난과 암세포 되어

세 딸은 아버지의 깊은 마음을 알지 못한다. 이경준 씨는 암과 가난으로 고통받고 있지만 늘 세 딸의 행복만을 생각한다. 우태욱기자 woo@msnet.co.kr
세 딸은 아버지의 깊은 마음을 알지 못한다. 이경준 씨는 암과 가난으로 고통받고 있지만 늘 세 딸의 행복만을 생각한다. 우태욱기자 woo@msnet.co.kr

이경준(가명·47) 씨의 집은 시커먼 곰팡이로 덮여 있다. 현관 입구부터 부엌 싱크대 주변, 세 딸이 함께 쓰는 좁은 방까지 집안 곳곳에 곰팡이가 번져 있다. 두꺼운 벽지를 바르고 흰색 페인트를 칠해도 소용이 없다. 이 씨는 온 집안을 도배하는 곰팡이가 무섭다. 자신의 삶을 덮친 가난, 간에 파고든 암세포와 곰팡이가 닮아서다. 가난은 곰팡이처럼 지독했고, 암세포는 곰팡이처럼 질겼다.

◆엄마가 떠나다

이 씨가 사는 곳은 대학가 원룸촌이다. 30㎡ 남짓한 방이 누군가에게는 잠시 거쳐가는 '자취방'이지만 이 씨에게는 딸 혜주(가명·15·여)와 혜민(가명·14·여), 혜정(가명·13·여)이와 함께 지내는 보금자리다. 이 씨는 이곳으로 3년 전 이사왔다. 아내가 사채에 손을 대기 전까지만 해도 72㎡짜리 아파트에서 세 딸과 함께 평범한 삶을 꿈꿨던 가장이었다.

아내는 좀체 속을 터놓지 않는 사람이었다. 결혼생활이 길어질수록 집을 비우는 날이 잦아졌고 남편에게 거짓말을 하는 횟수도 늘었다. 아내가 사채에 손을 댔다는 것도 집에 들이닥친 사채업자 때문에 알게 됐다. 아내는 '휴대폰 깡'으로 대출을 받았다. 휴대전화만 있으면 누구나 대출이 가능하다는 광고에 속아 500만원이 넘는 돈을 빌렸다. 빚은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아내는 그 빚을 갚기 위해 아이들 명의로 휴대전화를 개설했고 어린 세 딸마저 신용불량자가 됐다.

사채업자들은 당시 초등학교 4학년이던 맏딸 혜주 학교에도 찾아갔다. 돈을 떼먹은 엄마를 찾기 위해서였다. 업자들은 자신을 "혜주 삼촌"이라고 소개하며 학교에서 아이를 찾았다. 혜주에게 큰아버지는 있었지만 젊은 삼촌은 없었다. 그들은 학교를 마치고 집으로 가는 혜주를 찾아내 차에 실어 가려는 시도까지 했다. 부모의 빚으로 아이들에게도 큰 고통이 됐다.

◆갑자기 들이닥친 암

지난 2005년 이 씨는 결국 아내와 이혼을 했다. 그 무렵 어렵게 장만한 아파트는 빚쟁이에게 넘어갔다. 아파트는 이 씨에게 특별했다. 집을 사기 위해 경북 성주에서 참외농사를 지었던 아버지가 빚을 내 2천만원을 보탰고, 나머지 4천만원은 은행 대출금과 28살 때부터 양계장 설비 공사일을 하며 한푼 두푼 모은 돈으로 마련했다. 집은 '열심히 살면 된다'는 마음 속 외침이 현실이 된 것이다. 하지만 빚 앞에 모든 것이 무너졌다.

아내가 1년 전 아이들을 다시 찾아왔다. 아내는 끝까지 이 씨를 배반했다. 혜주 명의로 돼 있는 생계급여 통장에서 100만원을 빼내 달아났다. 아내와의 인연은 그렇게 완전히 끊겼다.

집과 아내를 잃었지만 그는 세 딸을 위해 일을 해야 했다. 이 씨는 양계장 축사에 닭장과 달걀을 운반하는 컨베이너 벨트 등을 설치했다. 몸으로 때우는 일이라 매일 하지 못하고 한 달에 절반 정도 일을 했다. 6년 전 당뇨에 걸린 사실을 알았지만 병을 애써 외면했다. 아버지라는 의무감 때문이었다. 그러다가 지난 2008년 이 씨는 집에서 쓰러졌다. 당뇨는 암으로 번졌다. 다리가 퉁퉁 부었을 때 그것이 간암 때문이라는 사실을 그는 미처 알지 못했다.

자식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한 이 씨는 지금 제 몸을 돌볼 여유조차 없다. 간암 3기, 이 씨는 암 진단을 받고 지금까지 살아온 것이 기적이라고 생각하며 하루를 산다. 병원비를 한꺼번에 낼 수 없어 친구들에게 카드를 빌려 계산했다. 빌린 돈은 정부 보조금이 나오면 그때마다 조금씩 갚았다. 이런 처지에 수술비 400만원은 꿈도 꿀 수 없다. 입원을 해 장기 치료를 받고 싶어도 아이들 걱정에 집을 오래 비우지 못한다. 이 씨는 병원에 잠시 입원할 때도 된장찌개와 어묵볶음 등 아이들이 먹을 반찬은 꼭 준비해 두고 간다. 암세포의 공격을 받으면서도 아버지는 항상 자식을 먼저 생각한다.

◆철없는 아이들

사춘기 소녀들은 낯가림이 심했다. 취재진과 마주친 혜주와 혜민이는 인사 대신 컴퓨터 모니터 앞에 쪼그려 앉아 아이돌 가수의 동영상을 보며 낄낄대고 있었다. 가난과 아버지의 병, 엄마를 잃은 상처는 아이들을 외부와 단절시켰다. 이 모든 상처를 잊고 아이들을 잠시라도 웃게 하는 것은 TV 속 아이돌 가수였다.

이 씨의 집은 원룸이지만 미닫이 문으로 구분된 방이 하나 있다. 세 자매가 나란히 누으면 움직일 공간조차 없는 좁은 방이다. 그곳에서 막내 혜정이는 귀에 이어폰을 꽂고 노래를 듣고 있었다. 고개를 푹 숙이고 있던 혜정이는 좋아하는 과목이 뭐냐는 질문에 "국어"라며 얼굴을 들었다.

지난해 10월 한글날 교내 글쓰기 대회에서 최우수상을 탈 만큼 혜정이는 글솜씨가 있다. 혜정이는 학교생활에 최선을 다한다. 지난해 받은 상장만 7개다. 줄넘기 대회에서 받은 상, 학력 진보상과 모범상 등 혜정이가 받아온 상장은 병으로 고통받는 아빠를 뿌듯하게 했다.

이런 아이들을 볼 때마다 이 씨는 곰팡이로 얼룩진 이 집을 벗어날 수 있기를 바란다. 얼마 전 영구임대아파트 접수 신청서를 받은 뒤 이 바람이 더 간절해졌다. 좀 더 나은 환경에서 아이들이 공부하고 자랄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에서다. 300만원. 자신의 간암 수술비가 될 수도, 영구임대아파트 보증금이 될 수도 있는 돈이다. 이 씨는 "만약 300만원이 생긴다면 수술을 포기하고 임대 아파트 보증금으로 그 돈을 쓸 것"이라고 말했다. 이것이 아버지의 마음이다.

황수영기자 swimming@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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