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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을 요리하는 의사] 죽어감의 이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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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환자가 살아났다. 오후 10시쯤 산소수치가 떨어지고 호흡이 힘들어 평온실(임종실)로 옮긴다고 연락이 왔다. 2주일 전부터 하루 종일 침대에만 계시던 박 할머니가 떠나시나보다. 이튿날 출근해 보니 평온실에 할머니가 그대로 있었다.

훤칠한 키에 검정색 양복을 입고 있는 젊은 보호자가 손자라는 것을 한눈에 알았다. 돌이 지난 증손자와 같이 찍은 손자부부 사진이 할머니 휴대폰 화면이었다. "그냥 손자가 아니라, 금덩어리지. 우리 손자는 치과의사고, 손부는 의사야"라며 자랑하던 할머니 모습이 눈에 선했다. 신기하게도 할머니는 평온실에서 통증이나 호흡곤란이 없는 안정된 상태를 유지했다.

병원에서 밤을 지새운 손자는 일터로 갔고, 다른 가족이 교대로 지켰다. 교회 권사인 박 할머니 옆에는 찬송가가 흐르고, 머리가 희끗희끗한 아들과 며느리의 이별 이야기도 평온실 너머로 들렸다. 그런데 그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할머니는 편안했다. 평온실을 나와 일반 병실로 가야 했다. 일주일이 지나면서 둘째아들은 화가 난 얼굴로 상담을 신청했다. 목욕하는 것이 힘든 상황이라서 반대했는데 그것이 불만이었고, 또 할머니의 상태 때문에 막내아들 졸업식에 못간 것을 하소연했다. 박 할머니는 30살에 혼자 돼 4남매를 키웠다. 폐암이 머리와 골반 뼈로 전이되자 통증이 심해서 호스피스병동에 입원을 했다.

"어머니와 같이한 달 보름 동안 저는 참 행복했습니다. 아드님은 병동에 잘 오시지 않으셔서 모르겠지만, 성경책이나 동화책을 읽어드리면 집중해 주시고 박수 쳐 주시는 그런 분이셨습니다. 카랑카랑한 할머니 목소리가 그립네요. 지금도 여자 혼자서 아이를 키운다는 것이 힘든데, 어머님께서는 그 과정을 다 겪은 분이셨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계시지 않나요? 그런 어머님의 긴 인생이 이제 편안히 막을 내리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보다 긴 임종단계는 남아있는 사람에게 주는 배려라고 아름답게 보면 안될까요? 임종실에서 일반 병실로 옮긴 다음 형수가 매일 와서 할머니 옆에서 성경책을 읽고 있어요."

목욕과 졸업식에 대한 답을 하지 않았지만, 편안하게 아들은 진료실을 나갔다. 손자와 딸의 따뜻함으로 긴 인생의 마지막을 행복하게 보낸 할머니가 이제 떠나고 있다. '죽음과 죽어감'에 익숙하지 못한 현대인이다. 유언을 하고 숨을 거두는 영화나 드라마에서나 있을 법한 죽음을 상상한다. '죽어감'이 3주일 정도로 길어지면, 기다리는 사람이 있다거나 한(恨)이 있다고 해석하기도 한다. 사돈의 8촌까지 연락해서 이별 인사를 하게 하기도 하고, 고부간의 갈등이 있었던 며느리나 미혼(未婚)인 자식이 있는 경우 한이 있다고 말하기도 한다. '태어남'이 같은 사람은 없다. 순조롭게 자연분만을 하는 경우도 있지만, 일찍 태어나서 인큐베이터 생활부터 하는 아이도 있다. 살아감도 다르듯이 죽어감도 사람마다 다른 것이다.

김여환 대구의료원 호스피스·완화의료센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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