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5년 영국.
조지 5세가 전 세계의 4분의 1을 통치하고 있을 때다. 조지 5세는 대영제국박람회의 폐막 연설을 둘째 아들인 요크공작에게 맡긴다. 수많은 대중이 그의 연설을 듣기 위해 운집해 있다. 그러나 그는 처음부터 말을 더듬기 시작한다. 말을 떼기가 힘들다. 더듬거리는 그의 연설에 사람들은 실망하며 고개를 돌린다.
'킹스 스피치'는 현재 영국 여왕인 엘리자베스 2세의 아버지로 1936년부터 1952년까지 재위한 조지 6세의 이야기다. 바로 요크 공작(콜린 퍼스)이다.
그는 어릴 적부터 심하게 말을 더듬는 증상이 있었다. "왕실의 권위는 떨어졌어. 이제 왕은 그들의 배우가 되어야 해!" 아버지 조지 5세는 그에게 이렇게 다그친다. 배우처럼 대중들 앞에 서야 하는 왕이 말을 더듬는다는 것은 치명적인 결함이다.
그는 처음부터 왕이 될 것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장남인 에드워드 8세(가이 피어스)가 당연히 왕위를 잇기 때문이다. 그러나 형은 세기의(?) 결정을 내린다. 왕이 된 지 8개월도 안 되어 사랑을 찾아 왕좌에서 내려오겠다고 발표한 것이다.
평소 딸들과의 대화에서조차 말을 더듬는 그가 처칠과 같은 달변가를 다루고, 국민들을 상대로 연설을 해야 하는 최악의 자리에 올라야 하는 것이다. 부인(헬레나 본햄 카터)은 그에게 호주 출신의 언어교정사 로그(제프리 러시)를 소개한다. 괴짜인 그는 왕에게 애칭을 부르며 말을 더듬게 된 원인을 찾으려고 하고, 왕실의 자존심과 부담을 한몸에 지고 있는 왕은 자신의 콤플렉스를 들키지 않으려고 기를 쓰면서 둘은 차츰 인간적인 관계를 형성한다.
'킹스 스피치'는 말더듬이 왕과 평민인 언어치료사의 휴먼 스토리를 당시 긴박했던 상황에 녹여 넣은 작품이다. 올해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 감독, 각본, 남우주연 등 이른바 주요 4개 부문을 석권했다.
'엘리자베스 1세' '존 아담스' 등 전기영화를 주로 만들었던 감독 톰 후퍼는 결함 있는 왕의 내면과 심리를 진정성 넘치게 그려내고 있다. 침묵 속에 '온 에어' 불빛만 반짝이는, 입에 침이 마르는 긴장감과 함께 유머도 섞어 잔잔하지만 입체적이고 풍성하게 끌어낸다.
특히 콜린 퍼스의 연기가 관객의 가슴을 채낚기 낚시하듯 잡아챈다. 박람회장에서 마이크 앞에서 긴장된 표정으로 입을 떼려고 머뭇거리는 모습은 오금이 저릴 정도다. 어릴 때 왕실에서 받은 상처와 억압, 커서는 왕의 책무까지 모두 껴안고 가야하는 운명을 받아들이는 내면 연기가 감동을 선사한다.
"나는 해군장교가 맞아. 왕은 싫어. 왕은 정말 싫어." 왕위에 오르기 전 아내 앞에서 눈물을 찍어내며 인간적인 고뇌를 드러내는 장면은 가슴이 먹먹해진다.
왕위에 오르고 첫 시련이 닥친다. 히틀러가 2차 대전을 일으킨 것이다. 왕은 국민과 군인들을 위해 개전(開戰)을 알리는 첫 대국민 연설을 하는 일생일대의 도전에 나선다.
언뜻 히틀러와 대비를 강조했으면 영화가 더 드라마틱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알다시피 히틀러는 세기적인 대중선동가다. 악의 편에 선 달변가와 선한 편이지만 말을 더듬는 왕의 대비는 절묘해 보인다.
그러나 감독은 콤플렉스를 극복한 조지 6세의 실화에만 초점을 맞추었다. 그래서 히틀러의 자극적인 연설과는 달리 베토벤 교향곡 7번이 깔리는 가운데 조지 6세가 연설하는 마지막 장면은 더욱 깊고 진정성이 넘치는 울림을 준다.
많은 사람은 불굴의 의지와 과감한 결단력, 명석한 두뇌를 가진 전지전능한 리더가 조직을 이끌어가기를 바란다. 그러나 리더십 전문가인 스콧 스눅 미국 하버드 경영대학원(HBS) 교수는 "진정성 있는 리더가 되기 위해선 때론 실수도 저지르고 두려워할 줄도 아는 불완전한 인간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이를 스스럼없이 밝힐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킹스 스피치'는 '영웅적이고 카리스마 넘치는 리더십'이 아니라 '진정성 리더십'의 진수를 보여준다. 시대극의 전형인 심각함을 걷어내고 웃음과 보편적인 감동을 끄집어낸 감독의 역량 또한 찬사를 보낸다. 12세 이상 관람가. 상영시간 118분.
김중기기자 filmtong@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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