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산사랑 산사람] 해남 두륜산

호남의 명산'다도해 풍광 한눈에

땅끝, 반도의 시작, 바다로의 출구, 대륙으로의 입구….

해남을 보는 시각은 제각각이다. 고립이 숙명인 반도의 시각에서는 '시작'이나 '출구'가 더 가깝게 느껴질 법도 한데 은둔에 길들여진 때문일까. '끝'이란 지명이 더 공감을 얻은 듯하다. 이름도 토말(土末)로 붙인 걸로 봐서는. 우리도 젊은 시절엔 금방금방 끝장을 봐야 직성이 풀렸지만 50줄 즈음해서는 시작이라는 말에 더욱 끌리게 된다. 어디까지나 인간들에 의해 재단된 것이기는 하지만, 끝과 시작의 경계에서 바다와 반도를 아우르며 우뚝 솟은 산이 있으니 해남 두륜산(703m)이다. 끝과 시작의 비밀을 찾아 해남으로 찾아가보자.

◆구림구곡 대흥사 숲길, 명품 산책로

좌이대수(左而帶水), 구림구곡(九林九曲)의 대흥사 숲길. 왼쪽에 계곡을 끼고 삼나무, 동백나무, 편백나무가 터널을 이룬 오리(五里) 길은 그 멋과 정취에서 아름다운 숲길 베스트에 올릴 만하다. 시간에 쫓기고 편리함에 길들여진 현대인들은 이 명품 길을 차창(車窓) 너머로만 본다. 하긴 등산이 목적인 사람들에게 왕복 10리 길은 부담스럽기는 하다.

오리 숲 끝자락에 고즈넉이 자리 잡은 유선관(遊仙館). 고풍스런 전통가옥인 이 건물은 영화 '서편제'와 '장군의 아들' 촬영지. 최근엔 1박2일에서 연예인들의 익살스런 눈싸움과 이곳의 푸짐한 음식상으로 화제가 됐다.

승속(僧俗)의 갈림길 일주문. 흐트러진 마음을 가다듬고 나서면 이내 부도밭이다. 서산대사, 초의선사의 부도부터 이곳 13대 종사, 13대 강사의 비를 모셨다.

해탈문을 지나쳐 대흥사 경내로 들어선다. 예쁜 분재처럼 꾸며진 연못과 당우(堂宇)가 그림처럼 펼쳐진다. 사찰 주위 동백나무 숲엔 붉은 점들이 봄빛 서정을 보태고 그 뒤로 가련봉, 노승봉, 두륜봉이 병풍처럼 펼쳐졌다.

대흥사에서 빠뜨려서는 안 될 것이 사찰에 걸린 편액들이다. 무량수각은 추사 김정희의 글씨이고 표충사는 정조대왕의 친필이다. 세기적 명필들의 작품이니 친견만으로도 축복이다.

표충사를 끼고 40분쯤 오르막길을 오르면 일지암(一枝庵)과 만난다. 일지암은 다성(茶聖)으로 일컫는 초의선사가 머물렀던 곳. 선사는 이곳에서 40년을 머물면서 '동다송'(東茶頌)과 '다신전'(茶神傳)을 집필했다. 생전에 다산과 추사가 자주 이곳에 들러 차를 나누었다고 한다. 일지암이란 이름은 '뱁새는 나무 한 가지에만 살아도 마음이 편하다'(安身在一枝)는 한산시(寒山詩)의 일지(一枝)를 따온 것이다.

다도는 고요와 통하는가. 봄 문턱 암자는 세상의 모든 소리를 사윈 듯 적막하다. 예전엔 스님들이 암자를 지키며 담소도 나누고 차도 대접했었다고 한다.

◆표독스런 암릉 타는 맛도 그만

초막 뒤 처마 밑 돌확에서 물 한 잔을 떠 마시고 두륜봉으로 오른다. 두륜산은 산꼭대기가 둥글게 생겼다고 해서 두륜산(頭輪山)이 되었다고도 하고 백두산의 두(頭)와 중국 곤륜산의 륜(崙)을 따서 명명(命名)했다고도 한다.

미륵암 입구를 지나 급경사를 오르자 두륜봉이 눈앞에 다가선다. 호흡을 가다듬고 사방을 우러른다. 바로 이웃한 주작, 덕룡이 공룡 등줄기 같은 거친 근육을 뽐낸다. 호남의 명산 영암 월출산, 광주의 무등산도 멀리서 산 너울을 그린다.

산 밑으로 시선을 던지면 청정해역 강진만, 완도, 진도 다도해의 섬들이 작은 점들로 일렁인다. 섬을 간지르는 하얀 포말, 섬은 졸리운 듯 연무 속으로 파고든다.

두륜봉과 가련봉 사이의 안일재는 북일면과 대흥사를 잇는 고개. 가을철 은빛으로 채색된 억새 물결은 두륜산의 1경으로 친다. 지금은 탈색된 억새만이 바람을 쓸고 있을 뿐.

안일재는 고봉에 흔치않은 평원인데다 햇볕이 따뜻해 동절기 산꾼들의 식사 장소로 최적이다.

계단이 잘 정비돼 산행이 한결 편리해졌지만 안일재에서 가련봉(迦蓮峰)으로 오르는 길은 전체 등산로 중 가장 험하다. 산 이름은 누가 지었는지 이름만 '가련'할 뿐 봉우리는 표독스럽기 그지없다. 그러나 여기는 두륜산 능선의 복판으로 암릉을 타는 맛은 그만이다.

노승의 머리처럼 생겼다는 노승봉은 바로 이웃해 있다. 여기서도 로프와 쇠줄을 타느라 한바탕 씨름을 한다. 때마침 스님 한 분이 봉우리에 올라왔다. 스님봉에 스님이 올라왔으니 이런걸 '산승일여'(山僧一如)라고 해야 하나? 산이 주인을 만난 격인데 스님은 그런 우연은 안중에 없는 듯 호기심 서린 이방인의 시선마저 가사(袈裟) 바람으로 휙 털어내고는 바삐 산을 내려가 버렸다.

밑을 내려다보니 일지암이 손에 잡힐 듯 정겹다. 봄기운이 세를 얻은 산 아래엔 회색빛 물결 사이로 연두색 음표가 돋는다. 머지않아 우린 봄의 교향악을 듣게 될 것이다.

여덟 장 연꽃잎 위에 얹힌 듯 평화롭게 자리 잡은 대흥사를 다시 한 번 내려다보고 오심재로 내려선다. 일행은 오른쪽으로 내려서 오소재로 하산길을 잡는다. 오소(烏巢)재는 주작산과 덕룡산을 잇는 재. 까마귀 둥지가 많다는 이름처럼 까마귀가 제법 소란을 떤다.

◆동백'비자나무 등 남방계 식물의 보고

내리막길, 울창한 동백림이 이어지고 이름 모를 활엽수들이 그늘을 드리운다. 두륜산은 동백, 비자, 후박, 북가시나무 등 남방계 식물의 보고다. 전문가들이 온난화로 인한 국내 생태계 변화를 연구할 때 두륜산이 그 기준점이 된다고 한다.

드디어 오소재 주차장. 5시간에 걸친 산행을 마무리한다. 다도해 수평선 너머로 노을이 옅게 깔렸다. 버스에 피곤한 몸을 누인다. 귀갓길, 차는 느릿느릿 산을 빠져나온다. 녹우당을 거쳐 해남 시가로 나오는 길, 플래카드마다 '땅끝 마을' 홍보문구들이 넘쳐난다.

은둔이 주는 매력일까. 호남의 명산들과 만남은 늘 설렌다. 재작년의 주작'덕룡, 작년 달마봉에 이어 이번 두륜산을 끝으로 해남, 강진의 100대 명산이 끝났다. 산정에서 내려다본 다도해는 늘 미지(未知)의 여운으로만 남았다. 긴 이동거리만큼 긴 감동이 함께했던 산들이었다.

◆교통=구마고속도로에서 남해고속도로로 갈아탄 후 순천에서 내려 벌교-보성-장흥-강진-해남으로 진행하거나, 88고속도로로 광주까지 가서 나주-영암-강진-해남으로 가면 된다.

◆숙박=▷유선관(061-534-3692) 대흥사 입구, 숙박요금 2인실 3만원. 저녁 1만원, 아침 7,000원. ▷해남유스호스텔(061-533-0170), 집단시설지구.

◆맛집=▷전주식당(061-532-7696)집단시설지구, 표고전골. ▷국향정(061-532-8922)해남읍 해리, 백반. ▷용궁해물탕(061-535-5161)해남읍 평동리, 해물탕.

글'사진 한상갑기자 arira6@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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