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신남희의 즐거운 책 읽기] 봉주르, 뚜르 /한윤섭 /문학동네

오래된 낙서에 얽힌 비밀

"열두 살, 프랑스에서 보는 첫 달이 움직였다. 달빛은 영사기에서 나오는 빛처럼 길게 방으로 들어왔다. 문득 책상 옆면에서 희미한 낙서를 발견했다. '사랑하는 나의 조국, 사랑하는 나의 가족' 한 뼘 정도 떨어진 곳에서 '살아야 한다'를 또 찾아냈다. 갑자기 어느 책에서 보았던 독립운동가의 얼굴이 떠올랐다. 어느새 달빛이 구름 뒤로 사라졌다. 보고 있던 글자들도 사라지고, 머릿속에 펼쳐졌던 스크린도 사라졌다."

프랑스 파리에서 남쪽으로 두 시간쯤 차를 달려 도착하는 작은 도시 뚜르. 한국회사의 프랑스지사에서 일하는 아빠를 둔 소년 봉주는 파리에서 뚜르로 이사를 간다. 이사 간 첫날 밤 별이 보이는 2층 창가에 누워 하늘을 바라보던 봉주는 한글로 쓰인 희미한 낙서를 발견한다. 낯선 이국땅에서 발견한 한글과 조금은 예사롭지 않은 낙서의 내용은 소년의 호기심을 자극하고, 소년은 비밀을 풀기 위해 실마리를 찾아 나선다.

문학동네 어린이문학상 대상을 받은 신인작가 한윤섭의 '봉주르, 뚜르'를 읽었다. 극작가와 연극연출가로 활동하는 작가의 첫 어린이 책이다.

프랑스의 인사말 봉주르와 비슷한 발음의 이름을 가진 소년 봉주는 하필이면 그 글씨에서 안중근 의사의 얼굴을 떠올린다. 그리고 이전에 그 집에 살았던 한국인이 없었는지 찾아 나서는 데, 비밀의 열쇠는 의외로 가까운 곳에 있었다. 봉주와 같은 반의, 노란색으로 머리카락을 물들인 소년 '토시'는 일본인으로 행세하지만, 봉주에 의해 조금씩 비밀이 드러나게 된다.

열두 살 소년 봉주는 프랑스에서 '북조선인민민주주의공화국' 출신의 소년 '토시'를 만난다. 토시의 가족은 어떤 이유로 일본국적을 갖고 일본인인 것처럼 살고 있었지만, 자신이 조선인이라는 것을 잊지 않고 있다.

"물론 내 국적은 일본이야. 하지만 난 공화국 사람이야. 그래서 너한테 프랑스어로 말하는 것보다 우리 공화국 말을 쓰는 게 편해. 네 방 책상에 있는 글씨는 아마 우리 삼촌이 써 놓은 걸 거야. 그 방은 삼촌 방이었으니까. 삼촌은 공화국을 많이 그리워해."

"네가 물어보지 않았다면 난 너한테 언제나 일본인이었을 거야. 내가 오늘 너를 찾아오지 않았다면 앞으로도 계속 일본인일 수도 있었어. 하지만 네가 물어본 이상, 너한테 감추고 싶지 않아. 그래서 이렇게 찾아온 거야. 내가 공화국 사람이란 걸 알려 주려고."

소년의 삼촌은 한때 유전공학을 연구했으나, 지금은 토시 가족이 운영하는 일본음식점의 주방장이다. 토시는 아버지와 함께 살지 못하고 가끔씩 만나는 것에 만족해야 한다. 조국을 사랑하지만 조국을 떠나 먼 이국땅에서 살기를 선택했고, 그래서 늘 숨어 다녀야 하는 것이 토시 가족의 비밀이다.

결국 봉주에게 비밀을 들켜버린 토시 가족은 뚜르를 떠나게 된다. 봉주는 자신의 쓸데없는 호기심을 후회하지만, 이미 늦어버렸다. 하지만 토시는 봉주에게 편지를 보낸다. 편지에서 토시는 자기 때문에 괜한 걱정하지 말라면서, 자신을 친구라고 말해 줘서 고맙다고 쓴다.

어린이 문학에서 현실 문제를 적절히 녹여내는 것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아이들이 살아갈 현실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데 문학만큼 좋은 매개체가 없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현실에 대한 문제의식을 담고 있으면서도 작품성이 뛰어난 어린이 책을 만나면 반갑다. 최근에는 한글 창제의 비밀을 둘러싼 이야기인 배유안의 '초정리 편지', 우리 역사 이야기를 팔도 사투리로 걸쭉하게 풀어낸 김기정의 '해를 삼킨 아이들'을 재미있게 읽었다.

'봉주르, 뚜르'는 어린이들의 눈높이에서 분단문제를 말하고 있다. 추리소설의 기법을 사용해 끝까지 호기심의 끈을 놓치지 않으면서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이 시대에도 여전히 풀어야 할 과제로 남아있는 분단문제를 이야기하는 이 작품의 문제의식은 그래서 더욱 귀하게 여겨진다.

용학도서관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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