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살아가는 이야기] 수학여행

여행 경비로 밀린 공납금 내고, 친구들 얘기만 들으며 속앓이

최주원 씨의 유일한 초등학교 수학여행 사진.
최주원 씨의 유일한 초등학교 수학여행 사진.

♥"친구들끼리 여행 한번 더 가자"

얼마 전 손수레를 끌고 마주오던 아주머니가 "어어~혹시 청기 명자네 옆집에 살던 연이 아닌지!"라고 물었다. 잘 아는 것에 깜짝 놀랐고 죄짓고 못 살아간다는 것을 새삼 느끼면서 누군지 도무지 생각이 나질 않아 "맞긴 맞는데 누구? 누구시죠?"

"아고~ 가스나야 아무리 살이 쪘어도 친구도 몰라보나 섭섭다. 니 앞에 앉았던 명숙이 아니가!" 그러고 보니 이미지가 조금 보이는 듯했다. "못 알아봐서 숙아 미안타." 시장가는 친구 손수레를 빼앗아 끌고 분식집으로 갔다. 의자에 앉아 마주보노라면 흐른 시간만큼이나 변해가고 있는 우리들 모습에 빠질 수 없는 자식 이야기에 신랑이야기, 그리고 친구 이야기로 이어지면서 숙이랑 난 교실에 앉아 있는 듯 이야기가 실타래처럼 풀어졌다.

영어단어를 몰라 훔쳐보다가 들킨 이야기부터 학교 뒷산에 일제강점기 때 파놓은 동굴이 위험해 들어가지 말라는 이야기를 무시하고 들어갔다 들켜 복도에서 신발 들고 벌 받던 이야기. 그리고 진짜 우리의 추억 가득했던 수학여행. 차멀미에 파김치 됐고 점심을 먹을 수 없어 하루 종일 비실거리다가 저녁시간 여관에 짐을 풀고 나서야 정신 차렸고 그때부터 수학여행은 시작이었다. 곯아떨어져 있는 친구 얼굴에 낙서를 하고 신발을 숨기고 선생님한테 혼날까봐 불 끄고 앉아서 놀았던 일. 우리가 숨긴 줄도 모르고 석굴암 갈 때 신발 없어 울던 순아. 꺼내주려 해도 선생님이 계셔서 혼날까봐 묵비권을 행사했고 순아는 선생님 슬리퍼 신고 석굴암 갔었다. 일출을 보고 내려와 우리가 숨겨둔 장소에 신발을 찾는데 없어져서 순아는 슬리퍼 신고 다녔고 우린 쌤한테 혼날까 말도 못하고 미안한 마음에 과자를 사줬었다. "기억하나."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4호차 중 3호차 교통사고 나서 뒤따라가던 4호 우리 차에 3호차 애들 다 태워 오느라 놀지도 못하고 등굣길 못잖은 수학여행이었다.

손뼉을 치며 맞장구를 치던 친구는 갑자기 바쁘다며 일어선다. 저녁 할 시간도 아닌데 조금만 더 이야기하자던 내 말에 학창시절 맘으로 친구들끼리 여행 한번 가자며 명함을 꺼낸다. "숙아! 넌 중국집 사장님이었나? 우리 가족 자장면 먹으려 한번 갈게, 기다려라."

이동연(대구 북구 복현2동)

♥아들은 꼭 보내주려 했는데…

어느덧 아들이 고등학생이 되어 수학여행 계획에 들떠 있었다. 이미 지난 얘기지만 '중국'으로 갈 계획이 있었으나 구제역과 일본대지진 등 여러 가지 원만하지 못한 조건으로 무기한 연기되긴 했지만 아무리 경비가 많이 들어도 일생에 한 번뿐인 고등학교 수학여행만은 꼭 보내주고 싶었다.

이것이 아버지의 심정일까? 하는 생각을 해 보면서 내가 못 가본 수학여행을 되돌아보았다. 전분기 학비 미납 독촉장을 내밀며 "아부지, 선생님이 꼭 미납금 받아 가져오라 합디더." 아무 말씀 없이 한숨만 내쉬셨던 아버지. 결국 받아가지 못했고 또 칠판 한 귀퉁이에 영광(?)스럽게도 내 이름 석자가 맨 위에 적히게 되었다. 그런 와중에 수학여행 안내장이 발부되었으니 아버지의 시름은 더욱 깊어졌다. 수학여행을 꼭 보내달라고 떼를 쓰는 나에게 그럼 하나만 선택하라고 하셨다. 무슨 뜻인지 몰라 암말 못하고 서 있으니 "수학여행이냐 공납금이냐?" 라고 물으셨다. 당연히 수학여행이라고 대답을 하자 "3일 동안 실컷 놀고 이 돈 날리고, 졸업할 때까지 칠판에 너의 이름 적힐래?"이러는 거였다. 그 시절엔 기초수급과 같은 복지혜택제도가 없었으므로 재학생이라면 무조건 납부해야만 했다. 아버지의 진지한 그 말씀을 듣고 보니 3일 만에 까먹을 돈에 조금만 더 보태면 3개월의 학비를 낼 수 있다는 계산에 그만 수학여행을 포기하고 말았다. 친구들은 당시 유행이었던 카세트를 챙겼고, 집안이 부유했던 친구는 기타를 들었다. 사진기를 들고 온 친구가 함께 못가는 아쉬움을 기념하기 위해 찍자며 '찰칵' 한껏 폼 잡은 사진이 유일하게 남은 '수학여행 직전' 사진이다. 그들은 수학여행 중에 많은 추억을 남겼고, 기차 안에서 즐겨 불렀다며 최헌의 '오동잎'노래를 들려주기도 했다.

30여 년이 지난 지금 그때의 추억을 들추어내면 나도 덩달아 '오동잎 한 잎 두 잎 떨어지는 가을밤에 그 어디서 들려오나 귀뚜라미 우는소리♩♬♪...' 함께 수학여행 곡(?) 18번, 그 시절의 노래를 불러 본다.

피재우(대구 수성구 만촌3동)

♥새신발 잃어버려 '최악의 여행'

우리가 중학교에 다니던 시절 나이◯라는 브랜드의 운동화가 처음 나왔다.

그 당시는 교복을 입을 때라 수학여행을 가려면 변변한 외출복이 없어 옷도 새로 사야 하고 신발도 사야 했는데 엄마를 며칠이나 조르고 졸라 난생처음 진남색에 빨간색 로고가 새겨진 나이◯ 브랜드 운동화를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는 수학여행 날 보무도 당당히 학교에 도착해 친구들에게 보란 듯이 자랑하고 다녔다. 친구들은 모두 내 새 신발을 부러워했고 나는 우쭐한 기분을 느꼈다. 그러나 그 신발이 수학여행 내내 근심이 될 줄은 몰랐다.

여행 내내 먼지라도 묻을까봐 살살 걷고 숙소에 도착해서도 방문 앞에 신발을 벗어두지 않고 봉지에 넣어서 방에다 두고 잤는데 다음날 아침 일어나 보니 신발이 없어진 것이었다. 놀라서 울며불며 선생님한테 말씀을 드렸지만 그때 당시 한 반 급우가 70명이 넘고 15반까지 있어 거의 1천 명의 학생이 움직인 터라 한곳에서 모든 학생을 수용하지도 못하는 형편이었다. 우리 숙소 아이의 소행인지 아니면 다른 숙소 아이의 소행인지도 밝히지 못한 채 여행을 위해 여기저기서 받은 구렁이알 같은 돈을 탈탈 털어 새 신발을 사야 했다.

선생님과 함께 신발점에 가서 신발을 고르는데 짝퉁 나이◯가 있었다. 그때는 짝퉁이 정교하지 않을 때였다. 메이커 신발의 로고가 날렵한 모양인 데 반해 짝퉁은 뭉툭한 모양이었지만 그래도 아쉬운 마음에 난 그걸 골랐다. 선생님도 웃으셨고 친구들도 어이없는 표정으로 아직 정신 못 차렸다며 메이커에 대한 내 열망을 매도했다.

이후 일정에 따라 여행을 계속하며 난 경치 구경은 않고 땅만 보고 갔다. 혹시 누가 내 신발을 신지나 않았나 하고. 하지만 한 번 내 곁을 떠난 신발은 다시 돌아오지 않았고 내 중학교 수학여행은 신발 잃어버린 추억만을 남긴 채 사진 한 장 없는 최악의 수학여행으로 남게 됐다.

"나이◯ 신발아! 내 수학여행 돌리도~"

김재정(대구 서구 평리동)

♥ 평소엔 지각 안하다가 하필 그날…

고교시절 그토록 기다리던 수학여행을 우리 반 아이들은 선생님 말씀에 따라 조를 짜서 각자가 챙겨 올 것을 친구들이랑 같이 준비하면서 내일을 기다렸다. 종례 시간에 선생님은 "내일 아침 6시 30분까지 시간 지켜서 학교에 모여라. 시간을 어길 시에는 그냥 출발한다."라고 하시면서 시간을 꼭 지킬 것을 강조 하셨다. 수학여행 전날은 새로운 곳에 간다는 설렘과 함께 나름대로 준비해야 하는 옷들을 챙기다 보니 늦게 잠자리에 들게 되었다.

아침에 눈을 뜨니 6시 30분이 넘었다. 그때는 자취하던 시절이라 깨워주지 않은 언니를 원망하면서 머리에 물만 바르고 택시를 타고 학교에 갔다. 휴대폰도 없던 시절이라 연락할 길은 없었고 택시 외에는 더 빠른 교통수단도 없었다.

학교 교문에 들어서니 거의 7시를 가리켰고 운동장으로 헐레벌떡 뛰어들어가니 운동장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아이들은 출석 체크가 끝나고 차에 다 타고 있었던 것이다.

마침 나를 발견하신 담임선생님은 어찌할 줄을 몰라 하면서 교감선생님이랑 이야기를 하시다가 나를 보자마자 반가워하시면서 "이 녀석, 시간 맞춰 와야지. 네가 늦게 와서 출발 시간이 지연됐잖아."하시면서 등짝을 손으로 때리셨다.

평소에 모범적인 태도를 보였던지라 아이들도 선생님도 내가 지각 하리라고는 생각도 못했던 것이다. 우리 반 아이들이 타고 있는 관광버스로 올라타니 아이들은 "야~지각생! 벌칙으로 노래해! 노래해!"하는 것이었다.

부끄러워 자리에 앉지도 못하고 그 자리에 서 있는데 선생님은 "벌칙은 나중에 받고 자리로 가서 앉아라" 하셨다. 자리에 앉은 뒤에는 시간이 어떻게 지나갔는지도 모르고 잠에 취해 버렸다.

그 일이 있은 후에는 별명 하나 없던 내게 친구들은 '지각생'하며 놀렸다.

좋은 별명은 아니지만 그 일로 성격이 더 활발해질 수 있었던 계기가 된 것 같고 그래서 잊을 수 없는 수학여행이다.

이유정(대구 달서구 이곡동)

♥달랑 한 장뿐인 수학여행 사진

1960, 70년대 학창시절 가장 아름다운 추억을 떠올린다면 뭐니 뭐니 해도 초등학교(당시 국민학교)수학여행일 것이다. 우리 모교는 산골이라 전기는 물론 버스도 들어오지 않고 모두 가정 형편이 어려워 6학년 졸업기념 경주 수학여행이 유일하게 차를 타고 가는 나들이였다.

어마어마한 큰 무덤에 와! 놀라버린 오릉, 포석정, 첨성대, 조상들의 장인 정신을 엿볼 수 있는 석굴암과 불국사, 다보탑, 석가탑, 보는 것마다 신기하지 않은 게 없었다. 또한, 난생처음 극장에서 본 영화? "야! 가자" 고함 소리에 벌떡 깨어보니 벌써 영화가 끝나 버렸다. 꿈속을 헤매다 보니 지금 나의 머릿속에는 '대왕극장'이란 이름밖에 기억이 나지 않는다. 지금도 그곳에서 손님을 맞이하고 있는지 궁금하다. 이러한 수학여행이 나와 우리들에게는 아름다운 추억과 함께 아쉬움도 안겨 주었다. 담임선생님은 좀 더 많은 곳을 보여주기 위해 바쁘게 다니시며 먼 후일 추억을 되돌아볼 수 있게 기념사진도 열심히 찍어주셨다. 그리고 포항 바닷가 유람선을 타는 기회도 주어졌다. 그러나 해변이 탈이었다. 선생님이 학생에게 필름이 든 가방을 맡겨 놓았는데 모래사장에서 놀다 그만 잃어버려 유람선 단체사진 한 장이 우리 '청계초등학교 17회' 수학여행의 유일한 기념사진이 되고 말았다.

그 시절이 못내 그리웠던 것일까. 2009년 봄을 맞아 각지에서 스물셋의 친구들이 경주에 모여 44년 전 그때 그 시절로 돌아가 세상을 떠나신 담임선생님을 그리워하고 추억과 향수를 달래며 사진도 마음껏 찍고 먼 후일 새로운 추억이 될 뜻 깊은 경주 수학여행을 다시 가졌다.

최주원(대구 동구 불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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