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신 낙동강시대] <48>예천 백송마을(2)

다른 것은 못 내놔도 박사 하나씩은 내놓는다는 '박사촌'

소나무가 우거지고 내성천 물길이 남쪽 삼봉산, 석교산, 우암산과 맞부딪치는 절경이 어우러진 예천군 호명면 백송리 백송마을.

입향조와 아들은 빼어난 절경을 배경으로 신선이 노닐만한 선몽대 정자를 만들었고, 퇴계 종손의 후손들은 과거 서당 공부와 과거시험에서 현재 유학과 향학열을 통해 큰선비와 학자로 거듭났다.

내성천변 굵고 나이든 소나무는 수백년 동안 마을을 고고히 지키고 있고, 입향조의 후손들은 지금까지 문중 제사를 이으며 선조들을 기리고 있다.

◆진성 이씨와 박사촌

백송은 퇴계 이황의 조카인 이굉의 후손들이 뿌리를 내린 만큼 학자들이 많이 배출됐다. 조선시대부터 일제강점기를 거쳐 한국전쟁 때까지 서당이 두 개나 운영될 정도로 마을에서 배움의 정신은 중요시 됐다. 조선시대 참봉을 지냈던 어른이 한국전쟁 이전까지 한학과 한자를 가르치던 백송서당은 1970년대 중반까지 그 터를 유지하다 관리를 제대로 하지 않아 지금은 흔적을 찾아보기 힘들다. 하지만 마을 아이들과 젊은이들이 글공부를 했던 일소헌(一笑軒)은 지금까지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일소헌은 해방 이후에도 인근 마을인 호명면 송곡리와 오천리의 아이들까지 몰려들 정도였다고 한다.

이오교(64) 씨는 "이성교라는 훈장 어른이 큰선비였는데, 아이들 한자 공부를 비롯해 많이 가르쳤는거라. 옆 마을 송곡에서도 오고 오천에서도 오고 사방에서 많이 왔어. 많을 때는 한 번에 20명까지 왔어"라고 말했다.

한국전쟁 이후 마을에서 서당이 사라지고, 아이들은 초등학교에 다니기 시작했다. 하지만 가정형편 등으로 기껏해야 자녀들을 읍면 단위 중학교에 보내면 공부를 많이 시키던 시절, 백송 어른들 상당수는 재산을 처분해 아이들 유학을 보냈다.

이재환(76) 씨는 "일제 때 토지를 팔아 서울이나, 일본으로 유학을 보내 대학을 시키기도 했어. 백송에는 교육열이 높아 박사 학위 받은 사람도 숱하게 나왔지"라고 말했다.

'서당과 유학'으로 대표되는 백송 사람들의 학문에 대한 높은 관심은 많은 학자들을 배출하는 토양이 됐다. 60가구 남짓한 마을에서 일제강점기 이후 지금까지 백송 출신 박사들이 60여 명에 이를 정도라는 것이다. 이 때문에 백송에서는 '다른 것은 못 내놓아도 박사 하나씩은 내놓는다'는 말이 나돌 정도여서 '박사촌' '박사마을'로도 불린다.

◆입향조 기리는 시사

백송 마을에서 연중 가장 큰 행사는 진성 이씨 백송파의 시사(時祀; 음력 10월 5대 이상의 조상 무덤에 지내는 제사)이다.

진성 이씨들이 전국 각지에서 모여 해마다 10월에 지내는 문중 제사인 것이다. 백송 입향조인 이굉과 아들 이열도를 비롯해 후손들을 모시는 의례로, 내성천과 우암산이 맞닿은 선몽대(仙夢臺)에서 제사를 올린 뒤 난산의 입향조 무덤에서 또 묘사를 지내고 있다.

이덕교(78) 씨는 "음력 10월 6일날 했는데, 마을 사람들이 다 (외지에) 나가 있으니까 일요일 아니면 시간이 없단 말이야. 그래가지고 음력 10월 첫 째주 일요일에 제사를 지낸다"며 "옛날엔 100명 정도까지 모였는데, 요즘은 50~60명 돼"라고 말했다.

종친들은 시사를 지내기 전 마을에서 유사 1명, 유사 일을 도와주는 수임 유사 4명, 외지 유사 2명까지 모두 7명이 준비를 하는데, 유사로 뽑히면 시사 전 4~5일 간은 다른 일은 손을 놓은 채 제사 준비에만 매달려야 한다.

진성 이씨 백송파는 이렇게 백송마을의 뿌리를 확인하고 입향조와 선조들을 기리는 행사를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다. 백송마을에는 또 단오날 그네를 타는 풍습도 전해졌다. 마을 중앙에 우뚝 선 100살이 훌쩍 넘는 회나무 한 그루가 그 대상이다. 마을 부녀자들은 해마다 단오날 그네를 매고 하루를 즐겼다고 한다.

◆600여 년 역사 품은 백송재사

백송은 1400년대 초반 함양 박씨가 처음 자리를 잡았다. 떠난 뒤 1500년대 진성 이씨가 둥지를 틀고 뿌리를 내렸다. 하지만 백송에는 그보다 앞선 고려 말과 조선 초 사이인 1390년대 한 고려 충신의 흔적도 남아 있다. 바로 1800년대 재건한 '백송재사'이다. 백송재사는 고려 말 충신인 순흥 안씨 노포(蘆浦) 안준(安俊)을 모시는 재실이다.

고려 공양왕 4년(1392) 포은 정몽주가 이성계 세력에 의해 살해된 뒤 우현보, 김진양 등 27명이 귀양길에 올랐다. 이 가운데 고려 말 문과에 급제하고 우왕(재위 기간 1375~1388) 때 남양부사, 판봉상시사, 경상'전라'충청 삼도체찰사 등을 지낸 노포 안준도 함께 있었다. 노포는 조선 태조 이성계가 왕위에 오른 뒤 직첩을 회수당한 채 유배지에 방치됐다. 이후 왕은 수차례 노포에게 벼슬을 내려 불렀으나 노포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노포는 다만 유배지를 경상남도 의령현에서 경상북도 예천으로 옮겨줄 것을 요청해 왕의 허락을 받았다.

노포는 예천군 개포면 경진리 '노포촌'에 터를 잡아 호를 노포라고 했다. 노포촌은 백송마을에서 내성천 건너 북서쪽에 인접해 있는 곳이다, 노포는 유배지에서 농부를 자처하며 도롱이와 삿갓 차림으로 생애를 마쳤다고 전해진다. 한 신하가 두 임금을 모시지 않는다는 '불사이군'의 절의를 지킨 것이다.

1345년 황해도 평산에서 태어난 노포는 말년에 '나라를 지켜내지 못한 죄인으로, 선조의 묘 곁에 장사 하지 말고, 묘비석도 세우지 말 것'을 자손들에게 당부했다고 한다. 노포의 후손들은 결국 노포촌에서 내성천을 건너 남동쪽 백송마을에 백송재사를 건립한 뒤 매년 음력 10월에 제사를 지내왔다. 벼슬을 그만두고 구미 금오산 움집에서 은거한 고려 말 충신 야은(冶隱) 길재(吉再)도 은거생활 중 노포에게 사찰을 보내 울분을 토로하기도 했다고 한다. 야은은 노포 보다 여섯 살 연하이다.

"강산도 예전과 다르고 풍물도 바뀌었습니다. 밝아오는 새벽에 닭들은 시끄럽게 울어대는데 눈을 떠 사방을 돌아보니 부끄럽게 보이지 않는 물건이 없습니다. 초가집 어느 곳에 이 미천한 몸을 의탁하겠습니까. 금오산 한 구석에 예나 변함없는 해와 구름, 그리고 초목도 무성하고 대나무도 울창합니다. 여기다 막을 치고 낮을 밤 삼아 목침 하나로 세월을 보내는데 새들이 날아와 지저귑니다. 행여 그대와 함께 다시 한번 만나서 두터웠던 구정(舊情)으로 회포라도 풀고 싶건만 이 실로 하늘의 장난이라, 인력으로 할 수 없으니 어찌합니까. 시를 지어 읊어보나 목조차 메이오니 옥같은 그대여 나의 마음을 위로해주오. 편지를 봉함에 복받치는 슬픔을 형언할 수 없습니다. 전일의 행춘추관주서 길재는 울면서 올립니다."

이후 세종은 노포의 후손들에게 나라의 녹을 주도록 했고, 정조는 노포에게 '충정'(忠靖)이란 시호를 내렸다고 한다.

◆담배, 사과에서 벼농사로

백송은 예로부터 양반촌이었던 탓에 마을 사람들이 직접 농사일을 하는 경우가 드물었다. 백송 사람들은 주로 소유하고 있는 땅을 영세한 농민들에게 빌려주고 곡식이나 돈으로 그 대금을 받아왔던 것이다. 백송 사람들이 직접 농사일에 나선 것은 한국전쟁 이후 마을에 '남의 집 살이' 하는 일꾼이 없어지면서부터이다. 하지만 가뭄에 물을 제대로 댈 수 없는 바람에 1980년대 수리조합이 생길 때까지 논농사는 큰 어려움을 겪었다.

이재환 씨는 "일제 때하고 그 이후에 연못(저수지)이 두 개 있었는데, 물이 너무 적어 논 열마지기에도 물 대기가 어려웠다"며 "30년 전에 안동에 수리조합이 생기면서 수로도 만들고, 물도 끌어댈 수 있어 논이 많이 생겼다고…."라고 했다.

백송에서는 한국전쟁 이전까지 담배농사와 사과농사가 일부 이뤄지다 전쟁 후 벼농사가 본격 시작됐다. 또 1990년대부터 벼농사 외에 내성천 변의 단무지용 무를 비롯해 깨, 옥수수 등을 주로 재배하고 있다. 백송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담배농사는 현재 3가구가 잇고 있다. 마을 북쪽 백송재실 앞 담배건조실과 마을 동쪽 넓은 들판 입구에 있는 옛 정미소 터가 백송 농사의 변천사를 대변하고 있다.

김병구기자 kbg@msnet.co.kr

공동기획:매일신문'(사)인문사회연구소

◇마을조사팀 ▷작가 김수정'이가영 ▷사진 박민우 ▷지도일러스트 권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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