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을 볼 때 제일 중요하면서도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은 약속이다. 여기서 말하는 약속은 공연 입장시간을 지키고 관람예절을 지키는 등을 얘기하는 게 아니다.
영화나 텔레비전 드라마와는 다른 연극의 약속을 말한다. 어떻게 보면 운동경기나 각종 게임의 규칙 정도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예를 들어 야구 규칙을 전혀 모른 채 야구 경기를 제대로 즐길 수는 없는 것과 같다고나 할까.
일종의 연극 규칙 즉 연극의 약속을 모르면 연극의 맛을 온전히 만끽하기는 어렵다는 얘기다. 이는 연극에도 오랜 역사를 통해 만들어진 규칙이 있기 때문이다. 물론 운동경기처럼 반드시 지켜야 할 정확한 조항이 있는 것은 아니다. 지금도 그 규칙은 변화하고 있고 새로 만들어지기도 한다. 하지만 연극을 볼 때 도움이 될 만한 규칙 혹은 약속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들은 분명히 존재한다. 물론 다른 예술분야도 마찬가지다.
연극보다는 상대적으로 접하기 쉬워서인지 영화나 텔레비전 드라마를 볼 때 알아야 할 약속에는 많은 사람들이 익숙해져 있다. 꿈 장면에서 화면이 흐려지고 회상 장면에서 화면이 흑백으로 변하는 기법 등은 대표적인 약속의 예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연극을 보는 사람들 중 상당수는 아직 연극의 약속에 익숙하지 않다. 심지어 연극의 약속을 전혀 모른다고 할 수 있을 정도의 사람도 있다. 그러니 연극은 낯설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영화처럼 화면에 나타나는 이미지가 아니라 눈앞에서 살아있는 배우들이 직접 움직이는 실제상황을 보면서도 영화에 비해 현실감이 떨어지는 가짜 같다고 느껴진다면 이는 아직도 연극의 약속에 익숙하지 않기 때문이다.
연극은 살아있는 현실이 아님을 알면서도 극장 안에서 지켜보는 순간만큼은 눈앞에서 펼쳐지는 현실이라고 믿으며 배우와 관객이 함께 환상을 만들어가는 것이다. 그런데 거기에는 시간과 공간의 제약이라는 한계가 있다. 만일 연극에서 한 인물의 과거와 현재의 모습을 보여주는 장면이 있다고 치자. 아무리 빨리 준비한다고 해도 분장부터 의상까지 꽤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한다. 그렇기 때문에 조명을 암전하거나 다른 인물이 나오는 장면으로 무대를 채우기라도 해야 할 것이다. 물론 이미 그런 차이점을 고려해 연극대본이 만들어져 있기는 하다. 어쨌든 영화라면 어떤가. 단 1초도 걸리지 않아서 그것들을 보여줄 수 있다. 원한다면 얼마든지 계속해서 반복할 수도 있다. 그래서 시간과 공간의 제약이 거의 없을 뿐만 아니라 편집으로 얼마든지 효과적인 장면을 만들 수 있는 영화와 연극을 동일한 잣대로 직접 비교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연극과 영화에는 분명히 다른 약속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연극에는 시간과 공간의 제약이라는 한계성을 극복하기 위한 많은 약속들이 존재한다. 예를 들어 강이나 빌딩은 직접 무대 위로 가져올 수 없으니 상징적이거나 실제와 흡사한 무대세트로 보여주고, 조명으로는 낮과 밤, 실내와 실외의 단순한 사실에서부터 인물의 심리변화까지 표현하기도 한다. 이것들이 모두 연극의 약속이다. 물론 그보다 더 익숙하고 유명한 약속으로는 방백이 있다. 이는 한 배우가 말한 것을 무대 위의 모든 배우가 들었지만 관객만 들은 걸로 약속하는 것으로 인물의 속마음을 드러내기 위한 아주 오래된 장치이자 연극의 대표적 약속이라 할 수 있다.
아무튼 지금까지 말한 약속이라는 것을 이해하고 연극을 본다면 작품을 더 깊이 이해하는 데 분명히 도움이 될 것이다. 처음에는 공원의 벤치였던 무대세트가 아무런 변화도 없이 배우의 연기에 따라서 지하철 좌석으로, 택시 뒷좌석으로, 침대로, 썰매로, 보트로 변하기도 하는 것은 대놓고 말하지는 않았지만 공연을 통해 느낄 수 있는 배우와 관객의 약속인 셈이다. 혹시 그런 장면들이 어색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졌다면 여러분은 이미 연극의 약속에 익숙해졌다는 뜻이 된다. 하지만 우리가 알아야 할 연극의 약속은 무궁무진하다. 기존에 있던 약속 이외에 그 작품 내에서만 존재하는 새로운 약속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을 찾을 수 있는가, 이해할 수 있는가는 모두 관객의 몫이다. 어쨌든 연극의 약속을 많이 알면 알수록 연극을 보는 재미도 따라서 커진다는 것은 분명하다.
안희철 극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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