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영순(48'여'뇌병변 장애 2급) 씨의 집은 '꽃세상'이다. 33㎡ 남짓한 좁은 공간이지만 투명 장식장과 벽, 부엌에는 그가 직접 만든 조화가 곳곳을 장식하고 있다.
"이것은 제가 제일 좋아하는 꽃이에요." 고 씨가 연두색 꽃을 집어들고 활짝 웃었다. 현재 그의 머릿속에는 종양이 자라고 있지만 그는 오늘도 꽃을 만들며 희망을 끈을 놓지 않고 있다.
◆굴곡 많은 삶
27일 오후 대구의 한 영구임대아파트. 고 씨는 고등학교 1학년인 아들 안민규(가명'16) 군과 단둘이 산다. 2000년 10월 남편과 이혼한 뒤 줄곧 혼자 힘으로 아들을 키워왔다. "내 인생은 책으로 한 권 엮어도 될 만큼 참 굴곡이 많아요."
고 씨는 3남 2녀 중 막내딸로 태어나 부모님의 사랑을 독차지하며 자랐다. 교사였던 아버지는 막내딸이 원하는 것은 뭐든지 들어줬다. "피아노를 배우고 싶다면 그 당시에 엄청나게 비싼 피아노도 사주셨고 제가 해달라는 것은 뭐든지 다 해주셨어요."
그는 부족함이 없는 유년시절을 보냈고 고등학교 졸업 뒤 지역 사립대에 입학했다. 남편을 만난 곳도 바로 대학이었다.
"그냥 착한 남자를 만나고 싶었어요. 남편이 탄탄한 직업은 없었지만 마음씨가 좋아서 택했는데. 제가 그땐 너무 철이 없었던 거죠."
고 씨는 27세 되던 해에 남편과 결혼했고 그때부터 인생의 내리막길이 시작됐다. 남을 쉽게 믿고 친구에게 모든 것을 퍼주는 것이 문제였다. 고 씨와 상의 없이 시댁의 땅을 담보로 친구에게 보증을 서줬고 사업을 하겠다며 친정과 시댁에서 돈을 빌려 날리기도 했다.
◆악착같이 살았지만…
남편의 사업 실패와 보증으로 고 씨 가정은 5년 만에 5억원이 넘는 빚더미에 올라앉았다. 부모님 그늘에서 편안하게 자랐던 그는 빚을 갚기 위해 세상으로 나갔다. 화장품 출장 판매부터 식당 설거지, 노점에서 옷을 팔기도 하는 등 잠자는 시간까지 아껴가며 악착같이 돈을 벌었다. 그렇게 번 돈은 대부분 이자를 갚는데 빠져나갔다.
그러다가 친구의 도움을 받아 대구에 작은 옷가게를 차렸다. "내 가게가 생겼으니 이 일이라도 열심히 하면 다시 시작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그의 바람은 오래가지 못했다. 남편에게 연대 보증을 서줬던 친정아버지 집에 차압이 들어왔고 빚을 갚기 위해 가게를 내놓아야 했다. 그 충격으로 중풍으로 쓰러진 아버지는 병상에 누워 있다가 7년 전 고 씨의 곁을 영원히 떠났다. "나 때문에, 우리 엄마 삶이 초라해졌어요. 노년에 집을 잃고 이제 혼자서 지내세요." 어머니(80) 이야기가 나오자 고 씨는 끝내 눈물을 쏟았다. 고 씨는 가장 역할을 하지 못한 남편과 결국 갈라섰다.
◆아들을 위한 삶
민규를 위해서라도 고 씨는 힘을 내야 했다. 2001년 고 씨는 경북 지역을 돌며 화장품 판매를 하는 일을 다시 시작했다. 머리가 심하게 지끈거린 것도 그 무렵이었다. 한 알씩 먹던 두통약은 점차 두 알, 세 알로 늘어났고 약으로 감당할 수 없는 고통이 그를 덮쳤다. "큰 병원에 가면 최소 몇백만원이잖아요. 견딜 수 있을 때까지 참으려고 했어요." 그러다가 결국 일이 터졌다. 집에서 쓰러진 그는 종합병원으로 실려갔고 뇌종양의 일종인 '상세불명의 수막양성신생물' 진단을 받았다. 신경외과에서 뇌종양 제거술을 3차례나 받으면서 직장 생활을 할 수 없게 됐고 몸도 완전히 망가졌다.
"보세요. 신경이 죽어서 이제 머리카락이 나지 않아요." 인터뷰 내내 야구모자를 쓰고 있던 고 씨가 모자를 벗자 머리카락 대신 머리 속살이 나타났다.
2001년 가을 기초생활수급자가 된 고 씨는 생계급여 70만원으로 힘든 삶을 이어간다. 몸이 불편한 엄마를 대신해 민규가 빨래와 설거지 등 집안일을 도맡아 한다. 고 씨는 어려운 가정 형편에 민규가 바르게 자라준 것만으로도 감사해한다. 민규의 꿈은 사회복지사다. "제가 항상 민규한테 '우리가 받은 도움을 되돌려줘야 한다'고 말했거든요. 민규가 그 영향을 받았나봐요." 고 씨는 아들이 꿈을 이루는 그날까지 이 세상에 남아 민규 곁을 지켜주고 싶다.
황수영기자 swimming@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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