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포항 '문화 불모지' 오명 자초…먼지 뒤집어쓴 '스토리텔링'

장기목장성·흥인군 비석, 층비 단량 비석·고인돌 등 한의학의 대가 이규준

포항시 남구 동해면 흥환리의 장기목장성 비각.
포항시 남구 동해면 흥환리의 장기목장성 비각.
장기목장성 비각 위치를 안내하는 도로 표지판. 햇빛에 바래고 글자가 떨어져 나가 내용을 알아보기 힘들다
장기목장성 비각 위치를 안내하는 도로 표지판. 햇빛에 바래고 글자가 떨어져 나가 내용을 알아보기 힘들다
포항시 남구 동해면 흥환리 바닷가에 위치한 흥인군 이최응(흥선대원군 이하응의 친형) 공적비.
포항시 남구 동해면 흥환리 바닷가에 위치한 흥인군 이최응(흥선대원군 이하응의 친형) 공적비.
충직스런 여자 노비
충직스런 여자 노비 '단량'을 기리기 위해 세운 공적비. 역사적 가치가 높은 문화재로 평가받고 있지만 지금도 비바람에 그대로 노출된 채 관리조차 되지 않고 있다.

포항의 문화재가 방치되고 있다. 변변한 연구 한 번 못하고 훼손된 상태로 놓여 있는 수백 기의 고인돌과 비석 등이 그 증거다. 지역민들 스스로가 포항을 '문화 불모지'로 만들어가고 있는 셈이다. 방치 혹은 훼손 정도가 심각한 지역문화재를 둘러보았다.

◆장기목장성과 흥인군 비석

장기목장성과 흥인군 비석이 있다는 포항시 남구 동해면 흥환리. 안내판이 있다는 소리에 한참을 찾았지만 쉽사리 발견하기 어려웠다. 마을 주민에게 물어보니 글자가 모두 떨어져 나간 한 표지판을 가르쳐 준다. 2001년에 설치된 것이지만 이미 너무 낡아 내용을 알아보기 힘들었다. 또다시 주민에게 물어 표지판에서 100여m를 가니 작은 비각(비석을 모셔둔 정자 형태의 구조물)이 나왔다. 이 역시 표지판과 같은 시기에 세워진 것이나 칠이 벗겨지고 나무가 갈라져 을씨년스럽다.

장기목장은 1651년 조선 초기 군소 목장을 통합해 건립됐다. 강인한 북벌 계획을 내세웠던 효종이 군마를 확보하기 위해 직위 2년 만에 내린 결정이었다. 조선시대 말의 중요성을 알려주듯 이곳은 과거부터 재력과 권력이 집중되던 곳이었다. 특히 조선 후기 세력가였던 흥인군 이최응(흥선대원군 이하응의 친형)의 공적을 기리는 비석이 아직도 남아 이러한 사실을 뒷받침한다. 공적비는 이곳에서 서민들에게 높은 세금을 물리던 모리배들을 흥인군이 직접 일망타진한 내용을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현재 장기목장성은 몇몇 무너진 성곽들만이 과거의 성세를 짐작하게 할 뿐 제대로 된 학술 연구조차 진행된 적이 없다. 흥인군 공적비 역시 바닷가 한적한 곳에 방치돼 있던 것을 마을 주민들이 성황당으로 모시기 위해 보존해 왔으며 향토사학자들에 의해 수차례 문화재 지정 요청이 있었으나 번번이 무산됐다. 지난 2001년 들어서야 포항시의 지원을 받아 겨우 비각이 세워졌다.

◆비바람에 깎여가는 '충비 단량 비석'

우리나라에서 노비를 위해 세워진 비석은 거의 없다. 그것도 '계집종'을 위한 공적비는 더욱 찾아보기 힘들다. 포항시 남구 구룡포읍 성동리 광남서원 안에 놓여진 '충비 단량 비석'은 그만큼 역사적 가치가 높은 유물이다. 그러나 이 노비 비석은 문화재 지정은커녕 지금도 외부에 그대로 노출돼 비바람을 고스란히 맞고 있다. 아이러니한 것은 지금으로부터 100여 년 전 이 비석을 다시 해석해 세운 모조 비석이 비각 아래에 고이 모셔져 있다는 점이다.

이 비석은 조선 단종 때 영의정이었던 황보인의 여자 노비 '단량'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1452년 수양대군이 정권을 잡기 위해 계유정난을 일으키자 영의정 황보인도 첫째와 둘째 아들, 두 손자와 함께 죽음을 맞게 됐다. 이렇게 황보씨의 대가 끊길 위기에 처하자 계집종 단량은 젖먹이였던 황보인의 어린 손자, 황보단을 물동이에 숨겨 피신했다. 그렇게 서울에서 포항 구룡포까지 천 리 가까이 도망친 이들은 구룡포에 터를 잡고 살게 된다. 이렇게 황보 일가는 한 계집종의 희생으로 근 300년간 몸을 낮추고 간신히 맥을 이어갔다. 정조 때가 돼서야 누명이 풀리니 황보씨 가문은 다시 살아났고 단량의 고마움을 기려 비석을 세웠다. 지금도 포항 구룡포에는 마을 단위로는 전국에서 가장 많은 황보 성씨가 살고 있다.

◆초야에 묻힌 '석곡 이규준 선생'

포항에서 태어나 포항에 터를 잡고 살아온 인물 중에 한의학의 대가 '석곡 이규준' 선생이 있다. 1855년 철종 6년에 동해면 임곡리에서 출생한 석곡 선생은 오로지 독학으로 한의학을 익혀 당대 경전처럼 읽히던 황제내경과 동의보감을 비평'보완한 인물로 유명하다. 이 밖에도 성리학과 역경 등을 익혀 당대에 견줄 만한 학자가 거의 없었다고 전해진다. 지금도 매년 10월 마지막 주 일요일이면 석곡 선생의 유지를 이어받은 '소문학파'(선생의 저서 중 황제내경을 비평하고 보완한 저서 '소문대요'에서 이름을 따온 학파)의 제자 100여 명 정도가 묘소 참배 행사를 하고 있다. 그러나 석곡 선생은 지역 학자로 평가절하돼 재해석이 이뤄지지 않았으며 지난해에 겨우 선생의 저서에 쓰인 목판이 경상북도 문화재로 지정됐다. 아쉽게도 그때는 당초 600개였던 목판 중 절반이 이미 사라진 뒤였다.

포항'신동우기자 sdw@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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