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기 전에'와 '월남에서 돌아온 김상사'가 담긴 데뷔앨범의 성공은 김추자뿐만 아니라 신중현에게도 반가운 일이었다. 당시 신중현은 덩키스, 김상희 등과의 작업을 통해 국악과 록음악의 접목에 몰두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김추자에게서 가능성을 실험해 보게 되는데 예상을 넘는 성공을 거두게 된다.
마치 창과 소울을 섞어 놓은 듯한 김추자의 창법과 무대에서의 모습은 당시 대중들에게 신선하면서 충격적이었다.(신중현은 1955년 미8군 무대를 통해 음악계에 데뷔한 이래 꾸준히 록음악과 국악의 접목을 고민했다. 그 고민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현재진행형이라는 점은 겸손이 아니라 거장이 가지는 음악에 대한 진지한 자세일 것이다. 어설픈 크로스오버가 난무하는 현실에서 신중현의 모습은 숭고하다.)
김추자는 데뷔와 동시에 각종 시상식에서 신인상과 여자가수상을 수상한다. TV와 극장쇼, 밤무대의 헤드라이너는 늘 김추자였고 판권을 가진 음반사는 여러 형태의 앨범을 시장에 쏟아냈다. 당시는 한 가수의 곡이 한 장의 앨범에 모두 수록되는 것이 아니라 옴니버스 형태로 발매되는 경우가 흔했는데 데뷔 앨범 이후 김추자는 10장이 넘는 앨범에 참여하기도 했다.
하지만 무리한 활동은 김추자를 도도한 신데렐라로 만들었다. 겹치기 출연으로 방송을 펑크 내는 일이 허다했고 심지어 리사이틀에서 마지막 무대에 서겠다는 이유로 김세레나같은 선배 가수와 몸싸움을 벌이는 일도 있었다. 결국 가수분과위원회는 3개월의 활동 중단 명령을 내리는데 한국 대중음악계 최초의 조치였다.
활동 정지 기간 동안 김추자에게는 감당할 수 없는 일들이 이어지는데 1970년대 최고의 가십거리 가운데 하나인 김추자 간첩설도 이때 생긴다. 방송 펑크 때마다 이사를 갔다고 거짓말을 한 것이 간첩처럼 이사를 자주 다닌다고 소문이 났고 급기야 이사 간 집에서 난수표가 발견되었다는 소문으로 번진다. 여기에 '거짓말이야'를 부를 때 하는 손짓이 간첩에게 보내는 신호라는 소문이 퍼지면서 직접 나서 해명을 하는 소동까지 벌어진다.
하지만 불행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결별한 매니저가 앙심을 품고 얼굴과 손을 난자하는 사건이 벌어지면서 치명적인 상처를 입게 된다. 재기를 위해 콘서트를 준비하고 있던 시점이라 충격은 더했다. 결국 얼굴에 붕대를 감은 채 콘서트를 강행했고 회한과 속죄의 무대를 가지면서 대중들에게 감동을 준다.
이후 김추자의 활동은 내리막길이었다. 제대로 준비한 콘서트는 화재로 인해 취소되었고 대마초 파동에 연루되면서 무기한 활동정지 처분을 받게 된다. 화려한 데뷔, 지독한 루머와 스캔들, 무대에 대한 한없는 열정과 좌절. 김추자는 1970년대 한국대중음악이 겪었던 비운을 보여준 소울의 여제였다.
권오성<대중음악평론가 museeros@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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