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산시에서 자인면까지 가는 가로수 길, 오월이면 이팝나무 꽃잎들이 하얗게 눈송이처럼 휘날리는 길, 따라가다 보면 그넷줄 길게 늘여 있는 자인면 계정숲이 보인다. 초등학교 시절 추석날 동네 느티나무에 맨 그네에서 빨강 갑사 치마를 입고 친구와 쌍그네를 타다 떨어진 기억을 떠올리며 장군 말 묘가 있는 새 못을 끼고 내려오면 냇물이 흐르는 동네를 만난다. 마당에는 향나무들이 서 있고, 모란과 자목련이 흐드러지게 피는 기와집, 더덕향이 좋아 아들 집에도 못 가신다는 아흔여덟의 어머니가 홀로 사시는 곳이다. 경로당엔 며느리뻘 되는 분들이 맛있게 점심도 지어주고 친절해 어머니는 동네를 떠나지 않으려 하신다.
계정숲은 자인농협 조합장을 13년간 하시고 면 의원을 지내셨던 아버지의 흔적이 많이 묻어 있다. 장군 무덤 옆 비석과 재실에 아버지 이름이 새겨져 있어 늘 살아계시는 느낌을 받는다. 그 당시에도 면 의원 선거운동이 치열해 고함과 웅성거리는 소리에 자다가 깨어 불안해했던 기억이 난다. 계정숲에는 낯선 땅에서 고향의 뿌리를 내리려던 아버지의 젊은 맥박이 초록 잎사귀들과 제비 풀꽃들과 어울려 제철 따라 다른 빛깔을 내며 끝없는 삶의 릴레이를 하고 있다.
자인면사무소 뒤로 조금 둘러 가면 제석사라고, 신라 귀족불교를 대중화한 원효대사 탄생지가 있다. 원효대사 어머니가 밤 숲을 지나다가 진통이 있어 밤나무 사이에 치마를 둘러치고 태아를 받았다고 한다. 그 옆으로 조금 걸어가면 자인초등학교가 있다. 계남1리에서 자인초등학교까지 가려면 40여 분은 걸어야 했다. 가다가 너무 추워서 논둑에 불을 피우기도 했고, 홍수가 나서 삼정굴 다리 건너다가 떠내려갈 뻔하기도 했다. 나는 마을에서도 외딴곳, 계하교 건너 까막새라는 과수원에서 자랐다. 까마귀가 많은 소란 뜻인가 싶다. 돌이켜보면 과수원은 작은 성이나 대단한 별장 같은 곳이었다.
대문 입구엔 찔레꽃과 살구나무 과수원 안으로 언덕이 있고 그 중간엔 들장미 피는 원두막이 있었다. 비 오는 날이면 사과 떨어지는 소리가 투둑거렸고, 하늘이 무너지는 듯 펄펄 눈이 내리는 날에는 언니들은 언덕에서 연애편지를 읽었다. 달 밝은 밤이면 네 자매가 마구간이나 부엌을 돌아다니며 지신 밟는 흉내를 내다가 수박밭에서 주먹으로 내리쳐 수박을 깨어 먹었고, 겨울엔 계란에 쌀을 넣어 밭에서 밥을 지어 먹거나 밀림지대 탐험을 하기도 했다. 냇물에서 여름엔 피리낚시를 하고 겨울엔 얼음 위에서 지게를 타고 '푸른 다뉴브 강의 왈츠'를 흥얼거렸다. 잔디 태우려고 불을 지르다가 눈썹을 태워 먹기도 했다. 과수원 안에 물을 대기 위한 수영장이 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아버진 지팡이와 중절모에 망토를 걸친 참 멋쟁이 미남이셨다. 사과 팔러 서울 갔다 오실 땐 소매치기 때문에 온몸에 돈을 둘둘 감고 내려오셨다. 사과를 일본으로 수출도 하셨는데 그땐 셋째 딸 정인숙-내 본명이다-이름을 붙여 보내곤 하셨다. 돌아가실 때까지 그림을 그리고 싶어하셨고 젊은 시절에는 쌀 팔아 바이올린을 사들고 오시다가 할아버지께 혼쭐이 나기도 한 아버지, 동동주 밀주를 담아 과수원 풀밭에 숨겨뒀다가 초등학교 선생님들을 모셔 대접하기도 했다. 가끔 선생님들이 나만 보면 또 동동주 없느냐 묻기도 해서 난감했던 기억도 난다. 6'25전쟁 당시 모두 피란 간다며 농사를 포기했을 때도 아버지는 "누가 먹더라도 농사는 지어야 한다"며 농사를 고집했던 기억도 난다.
낼모레 백수인 어머니는 지금도 글을 쓰고 싶어하신다. 대신 써 드릴 테니 얘기만 해보시라고 하고 받아 적은 시가 '낙동강'이다. 한 세기를 살아온 여인에게는 시대상이 그대로 나타난다. "너거 아부지는 마실에 숨어 있고 혼자 아아들 셋 데리고 외딴 과수원에서 자는 한밤중 총칼 든 빨갱이들이 우르르 몰려와 총구 들이밀며 돈을 요구했지. 빨갱이는 아주 무서운 사람인 줄 알았는데 가까운 동네 아는 사람이었어. 나중엔 총구 내리며 돈을 요구했지. 얼마 전 홍수에 떠내려간 세간 살 돈인데 이것뿐이라며 그 당시 큰돈이었는데 오백 원 내 놓으니 모두 고맙다며 돌아가더군. 그 이튿날 옆집에 그들이 나타났을 때 주인이 엉덩이 밑에 돈 깔고 앉아 주지 않았더니 불을 질러버렸지. 난 나중 경찰한테 당당하게 말했어. 돈을 주지 않으면 내가 내 자식이 죽는데 어쩔 수 없었다고."
귀리들이 바람의 귀에 서걱거리며 속삭이던 저녁 무렵, 초록 풀 뜯어 먹는 소와 건너편 노을을 보며 그림을 그리고 싶었던 그곳이 그런대로 유지돼 있다는 건 무척 고마운 일이다.
일연 스님의 삼국유사 내용 중 처용가를 변용해 대구 경상도 방언으로 쓴 첫 시집 연작 시 '신 처용가'의 모티브도 여기 과수원에서 비롯했다. 경북 월성군 양북면, 대왕 바위 가까운 곳에 사시는 고모부 두 분이 자주 놀러 오셨는데 그분들은 고모님이 불쌍할 정도로 최고의 한량이었다. 바람처럼 한 번씩 오시면 사랑채가 온통 들썩거렸다. 양춤을 춘다고 우스꽝스런 몸짓으로 노래하던 두 분을 고향 소식을 들고 오신다며 아버지는 무척 반가워하셨다. 세 분 무덤도 처용의 고향 대왕암 가까운 산골이니 자주 만나고 계실까? 그런 추억을 토대로 처용 아내의 입장에서 경상도 방언으로 쓴 시들이 시극으로 시어 사전에 많이 애용되고 있으니 경산 출신 일연 스님의 삼국유사와 알 수 없는 깊은 인연에 감사할 따름이다.
중학교부터 대구에서 자취하느라 가끔 집을 찾았다가 돌아갈 때 훌쩍이며 걸어갔던 탱자나무 가시울타리 길과 몇 년간 서로 삐쳤던 친구 옥란이와 화해한 연못 둑길, 외딴곳 친구도 없이 사상계를 읽으며 풀꽃들과 얘기 나누던 그 유년 시절이 내 시의 근원지가 되고 있으니 고향 계남리를 어찌 잊을 수 있을까.
고향이 아무리 역사적이고 훌륭한 고장이라 해도 내 고향, 영원한 안식처는 바로 어머니 아니겠는가. 어머니는 일제 강점기와 한국전쟁, 그 어렵고 험한 세상 근 100년의 역사 속 그 시절 딸 넷을 모두 대학공부시키기 위해 일꾼을 찾느라 과수원에서 마을로 날마다 종종걸음치며 다니셨다. 그 덕분에 지금까지 건강하시기도 하지만 한 가정을 꿋꿋이 지키고 견뎌 그 살림 그대로 외동아들에게 전해 준 여장부, 출렁출렁 흐르는 강물 그 넉넉한 품에 존경과 사랑을 보낸다.
시인 정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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