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도의 물이 한양으로 흐르게 하라.' 조선 개국과 함께 경상도 물을 한강으로 흐르게 한 충청도 마을이 있다. 바로 경북 문경시 동로면 명전리(鳴田里). 지리상으로 충청도 깊숙한 곳에 위치해 '충청도 속의 경상도 마을'로 불리는 이곳에는 50여 가구가 오손도순 삶의 터전을 일구고 있다.
◆충청도 속의 경상도
충청북도 단양군에서 '충청북도'라는 이정표를 지나 10리를 달려야 경북 문경시 동로면 명전리로 들어선다. 위치상으로 보면 경상도 땅일 이유가 없는 듯하다. 말씨도 다르고 물길도 다르다. 백두대간의 마루금이 대부분 경상도와 충청도의 경계인데, 이곳은 마루금에서 충청도 쪽으로 너무나 깊숙이 들어와 있다.
그러니 이 마을 사람들이 문경시내로 나오려면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니다. 그래도 불평이 없다. 편리한대로 오고가면 되지 경상도면 어떻고, 충청도면 어떠냐는 식이다.
"난 단양으로 장 보러 댕기여(다니여). 단양행 차량는 하루에 다섯 번도 더 댕기고, 문경 쪽은 아침저녁으로 두 번 빼기(밖에) 안 댕기거든…, 핀(편)한대로 살아여…."
"난 점촌으로 댕기여. 점촌 가는 버스비가 더 싸거든. 단양은 왕복 5천원이 넘고, 문경은 3천원도 안 되여. 그래고 점촌가만(가면) 빙원(병원)도 더 많고, 물긴(건)도 더 많아여…."
명전 마을에서 만난 두 할머니들의 대화다. 앞에 사람은 이 마을에서 태어나 이 마을로 시집왔다는 본동댁 서말순(75) 씨다. 그리고 또 한 사람은 서울에서 시집와 60년 되었다는 이정순(80) 씨. 이들은 "남편을 먼저 하늘나라로 보내고 혼자 살고있다"고 했다.
"산 좋고 물 좋고 경치 좋고 그래저래 살다보이 이래 혼자 됐네. 자석들은 다 벌어먹고 살라고 멀리 떠났고, 명절에나 한 번씩 온께 징(종)일 정자로, 집으로 왔다갔다하고 살지 머…."
명전리는 본래 충청도 땅이었다. 조선이 개국하면서 개국 공신 삼봉 정도전 선생이 조선팔도 물이 다 한양으로 모이는데, 오직 경상도만 물이 한강으로 오지 않는 것을 안타깝게 여기고, 명전리를 경상도로 편입해 경상도 물이 한양으로 오게 했다는 전설이 있다.
◆8개 마을이 자리잡은 8대 명당
동로면은 우리나라 8대 명당 중 하나로 풍수들에게 알려져 있다. 그래서 산간 오지임에도 예부터 내노라 하는 지관들이 자주 찾았던 곳이다.
명전 1리에 건학(乾鶴)'굴바우'본명전'당곡(堂谷)이, 2리에 대촌(大村)'방곡(傍谷 또는 오목내'五目內)'옥수동(玉水洞)'쇠점마 등 8개 마을이 있다.
건학(또는 그내기)은 이 마을의 맨 꼭대기에 있다. 학이 하늘로 날아오르기 전에 밭에서 한 번 울었다거나, 밭에서 항상 새떼가 울고 있다는 뜻에서 이 마을 이름을 명전(鳴田)이라고 했다.
"내가 시집 올 때는 점촌서 영주로 해서 단양으로 하루 종일 왔어요." 이곳에 1975년 시집 와서 신접살림 7개월을 살고 서울로 나갔다는 김영임(65'여) 씨가 마침 고향에 들렀다가 하는 말이다.
"시집 올 때 눈이 하도 마이(많이) 싸이(쌓여) 가지고 버스서 내리 가이고(가지고) 걸어오는데 정말 죽을 뿐(뻔) 했어요." 충북 땅 단양군 단성면 벌천리에서 명전이나 건학까지는 족히 10~20km다.
◆충청도 경상도 가르지 않고 오순도순
물길은 말씨를 씻는가. 한강 물길인 이곳 명전리 말씨는 낙동강 물길인 벌재 너머 동로 사람들과는 차이가 난다. 동로 말은 끝에 '~껴'가 들어가는데, 이곳은 충청도의 '~유'자와 '~껴'자의 중간쯤이랄까? 억양이 훨씬 부드럽고 느리다.
문경시내에서 이 마을에 오기 위해 충북 단양군 대강면 방곡리를 지나 단성면 벌천리를 거쳤다. 충청도와 경상도의 경계를 이루는 백두대간 마루금을 넘는데, 벌재 밑 개울 건너가 바로 충청도 단양 방곡 땅. 그리고 조금 내려오면 개울을 사이에 두고 명전과 방곡이 마주한 마을이 나온다. 이곳에는 3년 전 예천군 상리면으로 가는 길이 새로 나 삼거리 길이다.
오미자 농사를 짓고 있는 단양군 방곡마을의 정대화(52)'오정숙(70) 씨는 "농지가 개울 건너 문경 땅에 있어 그 땅에 오미자를 심었는데, 문경에서는 오미자에 지원을 많이 해 주길래 우리도 지원을 해달라고 했더니, 충청도 사람이라서 안 된다 카고, 충청도에서는 오미자 작목에 지원하는 제도가 없어서 안 된다 카고…. 순전히 우리 힘으로 오미자 농사를 짓고 있다"고 말했다.
그래서 그런가 그는 자생력이 커 오미자 농사를 동로 사람들보다 더 잘 짓는다고 한다. 물론 주변 지역이 해발 400~500m의 고지대라 조건이 좋은 것도 있지만, 밭 1만9천834㎡(6천평)에서 생산하는 오미자는 전량 주문 판매한다고 한다.
본래 오미자가 경상도와 충청도의 경계를 이루고 있는 황장산에 자생했다고 한다. 정 씨는 어릴 때 산에 오르며 머루와 오미자를 많이 따 먹었고, 지금도 야생 오미자가 많다고 한다. 그런데 이 야생 충청도 오미자를 경상도 동로 사람들이 밭으로 옮겨 심어 완전히 우리나라 오미자 시장을 석권하게 되었다는 것.
정 씨는 이곳에서 충청도 땅 방곡초등학교를 졸업했는데 개울 건너 명전 아이들과 함께 다녔다고 한다. 지금은 폐교가 돼 방곡도자기체험관으로 활용되고 있는 방곡초교는 경계가 없었던 것이다. 개울 건너가 경상도와 충청도라고 해서 사람 사는 것을 갈라놓지는 못했다.
이는 더 내려가 있는 경상도의 명전초등학교가 충청도의 벌천 사람들과 어울려 학교를 다닌 것과 같은 이치다. 이 학교도 폐교가 돼 다른 단체의 수련관으로 사용되고 있지만 개울 건너 마주하고 있는 충청도 벌천리 사람들과 어울려 공부를 하던 곳이다.
지금도 이곳에는 문경시 명전보건진료소가 있는데, 개울 건너 벌천 사람들이 많이 이용하고 있다.
50년째 구멍가게를 열고 있는 조인자(80'여) 씨는 "지끔은 장사도 안 되유. 그렇지만 어쩌겠슈. 핑생 여기서 살았는데, 이래 문이나 열어놓고 있어야쥬." 친정이 충청도라 아주 유창한 충청도 말로 사는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경상도와 충청도의 경계는 한낱 행정이나 정치 편의적인 것이지, 결코 사람 사는 것을 가로막지는 못했다. 그들에게 무슨 도(道)가 상관있으랴.경계란 그들의 눈에도 마음에도 없는 것 같았다.
"1980년까지 이 마을에 버스가 안 왔어요. 그런데 여기 우(위)에 건학에 산불이 났어요. 그때 도지사가 왔는데, 골짜기까지 너무 멀리 오니까 이상한지 마을사람들한테 소원을 말하라고 했어요. 그때 버스가 들어왔으면 좋겠다 했더니, 그때부터 버스가 들어왔어요." 서울에 나가 살다가 몇 해 전 귀향했다는 최명룡(60) 씨의 말이다. 그래서 그런가 문경여객의 현재 버스 노선이 '도 지정노선'이다. "비포장일 때는 항상 버스가 빵구가 나고, 손님은 적고…. 버스 회사로서는 명령노선이니까 안 갈 수는 없고…."문경여객 관계자의 말이다.
◆도예문화의 공유
명전리 건너 편 단양 방곡에는 예부터 문경처럼 도예지가 많았다. 현재도 이곳에서는 전통 도자기를 빚는 장인들이 있다. 옛 방곡초등학교가 도예체험장으로 조성돼 있고, 단양군에서는 도자기 전시판매장인 방곡도예촌을 만들어 운영 중이다.
그러나 예전에 비해 많이 시들해져 있다. 15곳이나 되던 요장(窯場)이 현재는 4곳밖에 없다. 경상도 문경과 비교해서는 그 간격이 더 벌어진다. 문경에서는 전통 도자기를 지역 특산물로 장려해 '전통찻사발축제'를 대한민국 최우수 축제로 성장시켰고, 덕분에 30여 명의 장인들이 저마다 열심히 도자기를 빚고 있다.
방곡도예촌을 지키고 있는 충청도 사람은 이런 경상도 도예의 모습을 비교하며 부러워 하고 있었다. 자연경관이나 도자기 역사나 이곳이 문경에 비해 못할 바가 없는데, 충청도 행정당국의 관심이 떨어진다는 불만이었다.
◆폐교 위 쓸쓸한 마을
1980년대 말까지만 해도 이 8개 마을마다 사람들이 빼곡히 살았다. 그 증거가 1945년 4월 19일에 세워진 명전공립국민학교다. 전교생이 400~500명으로 번창하던 학교였다. 경상도 명전마을과 충청도 벌천마을 아이들이 재잘거리며 만나던 교육공간이면서 양쪽 마을사람들이 이런저런 이유로 만나던 문화공간이었다. 그러나 50년 만인 1995년 2월 21일 제43회 졸업식을 끝으로 폐교됐다.
이 마을 아이들은 본래 명전학교를 졸업하고 충청도 땅 단성면에 있는 중학교를 다녔다고 한다.
백두대간이 똬리를 틀듯 경상도와 충청도를 첩첩산골로 말아놓은 명전리. 골도 깊고 물도 깊고 사람들의 수심도 깊었던 오지(奧地). 그러나 경상도'충청도를 가르지 않고 함께 배우며 함께 농사짓던 사람들. 다 어디로 갔는가. 1, 2리 다 합해도 대부분 노인들만 사는 50여 호의 미니 마을이 되어 버린 곳. 건너편 충청도도 마찬가지다. 방곡리에 있던 방곡초등학교는 더 일찍 문을 닫았다. 폐교 위에 쓸쓸한 이곳 경계 마을은 노인들이 지키고 있었다.
문경'고도현기자 dory@msnet.co.kr 고성환 시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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