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서명수의 집중 인터뷰] 북한 인권운동가 김영환 씨

'강철서신' 주사파 원조…"종북 확산 잘못 속죄, 北 민주화 앞장\

1980년대 주체사상파(주사파)의 대부이자 '강철 서신'의 저자 김영환(49) 씨. 그의 이름이 다시 세간에 오르내리게 된 것은 3월 말 북한인권 운동을 하다가 중국에서 체포돼 구금돼 있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부터다. 강제 구금된 지 114일 만에 석방된 그는 귀국하자마자 중국에서 엄청난 고문을 당했다고 폭로하면서 세상을 놀라게 했다.

통합진보당 사태 당시 종북(從北) 논란의 주역인 이석기 의원이 몸 담았던 '민혁당'을 건설, 주사파를 양성했던 주역이 바로 김영환 씨다. 그는 북한 공작원과 연계, 민혁당을 결성했고 북한이 보낸 잠수정을 타고 북한에 밀입북, 김일성을 두 차례나 접견했다. 그러나 그후 주체사상을 버리고 민혁당을 해체한 후, 자신이 배양하고 육성한 주사파의 싹을 자르겠다며 북한 민주화 운동에 앞장서고 있다.

그가 이번에 중국 공안에 '국가안전위해죄'라는 명목으로 체포돼 강제 구금된 것은 사실 그의 이런 대북활동을 '눈엣가시'처럼 불편해하던 북한 당국과 연계된 중국 공안이 그를 견제하기 위한 공작이었다.

인터뷰를 위해 만난 깡마른 체격에 기름기 하나 없는 담백한 모습의 그에게서는 '주사파의 대부'라는 수식어처럼 한 시대를 풍미한 '혁명가'다운 면모가 물씬 풍겨났다. '전향'이라는 말에도 그는 거부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민혁당 사건으로 수사 받을 당시인 1999년 작성한 A4용지 3쪽짜리 반성문을 들이밀어도 자신이 쓴 것이 맞다며 표정에 변함이 없었다.

중국에서의 활동과 고문 이야기부터 꺼냈다.

고문을 당한 후유증에 대해 묻자 "주관적으로 느끼는 후유증은 없다"면서도 "정신과에서 정신적으로는 후유증이 있다고 얘기하고 있다"고 말했다. 중국의 고문에 대해 그는 "현대 민주사회에서 있을 수 없는 반인권적 행위이기 때문에 적극적으로 제기하고 중국 정부에 분명한 의사 표시를 한 상태"라며 "이 문제를 그냥 덮어버리고 넘어갈 수는 없으며 유엔에 어떤 식으로든 문제 제기를 할 생각"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이 문제에 집중하기에는 부담이 만만찮다. 그를 둘러싼 주요 의제는 북한 인권 문제인데 자칫 고문 등 중국 인권 문제로 초점이 옮겨가버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가 벌이고 있는 북한 인권운동은 북한 사회의 내부 변화가 핵심이다. 북한 사회의 일반 주민들이 내부 사회의 진실을 정확하게 알게 하고 스스로 민주화 의지를 가질 수 있도록 여러 가지 형태의 도움을 주겠다는 것이다. 주체사상의 본거지인 북한 사회 내부의 변화를 이끌어냄으로써, 자신이 젊은 시절 남한 사회에 주체사상을 퍼뜨리면서 친북 분위기를 확산시킨 일에 대해 속죄를 하려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의 대북 활동은 이미 15년이 훨씬 넘었다. 그는 자신의 대북 활동의 성과에 대해 "북한 인권운동에서 가시적 성과라고 분명하게 얘기할 수 있는 것이 설사 있다고 하더라도 밝히기는 곤란하다"고 말했다.

그는 어떻게 해서 주체사상에 빠져들었고 민혁당을 건설했다가 해체하고 대북 활동가로 전향하게 된 것일까. 대학(서울대 공법학과)에 들어갈 때부터 그는 학생운동에 관심이 많았다고 했다.

"법대에 들어가면서 판'검사하겠다는 생각과 동시에 대학생으로서 민주화 운동을 하는 것은 당연한 의무 아니냐. 그래서 민주화 운동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가졌다. 당시 독재에 대해 강한 반감이 있었다. 운동가로서의 기질이 있었다고 볼 수도 있다. 그렇다고 직업적으로 혁명가로 살아야겠다는 생각이나 개념은 없었다."

5공 막바지인 1986년 작성한 '강철 서신'은 주사파를 확산시키는 기폭제로 작용했다. 강철 서신의 첫 번째 문건은 '미제의 스파이 박헌영으로부터 무엇을 배울 것인가'였다.

"(강철 서신의)형식도 영향을 많이 줬을 것이다. 당시 마르크스 레닌 원전을 보고 그대로 베끼거나 흉내내서 팸플릿을 내는 데 대한 반감이 운동권 사이에 많이 확산돼 있었고 1984, 85년부터 반미 분위기도 확산되고 있었다. 그런 영향도 있었다. 운동권 내의 분파 싸움이 있었는데 그런 것을 비판하는 방식이 호감을 줬던 것도 같고 여러 가지가 있었다."

강철 서신 이전에도 반미를 부추기고 주체사상을 선전하는 움직임이 없지 않았지만 강철 서신만한 파괴력이나 영향력은 없었다.

그는 1991년 북한이 보낸 반잠수정을 타고 밀입북해서 묘향산에서 김일성 주석을 두 차례 만났다. 북한노동당에도 입당했다. 당시 운동권에서 북한을 직접 다녀온 것은 그가 처음이다.

그는 북한을 직접 가서 보고 싶었다고 말했다. "북한에 대한 관심은 강철 서신을 쓰기 전부터 높았고 가보고 싶었다. 워낙 이론적인 관심이 높다보니 주체사상에 대해 김일성 주석과 토론해보고 싶은 것도 있었고 북한내 이론가들과도 만나고 싶었다. 그러나 정작 (주체사상에 대해)토론하려고 하자 김일성은 관심이 없었다…."

김 씨는 북한을 다녀온 후 북한 체제에 대한 생각을 완전히 바꾸게 됐다. 물론 그는 북한에 대한 생각을 바꾸게 된 것은 그보다 훨씬 전인 1989년 동구권 사회주의가 붕괴한 것을 목격하게 된 후부터였다.

그는 자신이 지도하던 민혁당 해체에 나섰다.

"상당히 많은 시간이 필요했고 여러 가지 단계를 거쳤다. 1993, 94년쯤에는 생각이 완전히 바뀐 상태였다. 어떻게 하면 민혁당 전체를 끌고 한꺼번에 돌아설까 연구했다. 나 혼자 빠져나온다는 생각을 한 적은 없다. 그들의 사상을 전환하기 전에 (민혁당을)해체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다. 해체하면 옛날 식으로 다시 조직을 운영할 것이기 때문이다. 사상 전환에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이 간부들을 바꾸는 것인데 제일 힘들었던 것이 (서열 2위였던) 하영옥 씨를 설득하는 것이다. 결국 잘 안 됐다. 나중에는 이탈해서 자기 멋대로 운영, 분열되다시피해서 중앙위를 소집해서 해체 선언한 것이다"

반발은 거셌다. 하영옥 계열에서 해체 선언은 무효라고 주장하면서 '생각이 바뀌었으면 탈퇴하면 되지 왜 조직을 해체하느냐'며 거세게 반발했다. 그 때 잔존한 세력의 핵심이 통합진보당 이석기 의원 중심의 '경기동부연합'이다.

이 의원이 민혁당 활동을 부인하고 있다고 전하자 그는 그저 "허허…" 웃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이 의원 등이 의원직을 지키려는 이유에 대해 "그들이 정당을 만들었을 때는 이 정당을 통해 한국사회에 어떤 영향을 미치겠다고 결심한 것이 있지 않겠느냐"며 "그런 것을 실현하기 위해 국회를 활용하려고 하고 있고 그래서 집요하게 국회의원직을 지키려고 하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그는 이어 "그런 것까지야 이해를 하지만 정치적 감각이나 판단 능력이 너무 떨어지는 것 같다"며 "예전에도 판단 능력이 떨어진다는 이야기가 많았는데 1980년대에 머물러 있는 것 같다"고도 말했다.

통합진보당내 구당권파 등 종북 세력의 목적에 대해 그는 "북한과 손잡고 미국을 몰아내서 용공적인 정권을 만들겠다는 것이 핵심적인 목표"라며 "국회에 진출한 것은 괄목할만한 성과지만 지금 그들의 정체가 드러나고 고립되면서 지난 10년래에 최고의 순간에 도달했다가 최악으로 떨어졌다"고 지적했다.

김정은 체제의 미래에 대해 그는 어떤 생각을 갖고 있을까.

"북한이 현재의 시스템으로 지속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쉽지 않다고 생각하니까 중국에 협조를 요청하고 개혁개방의 시늉을 내는 것이다. 또 실제로 개혁개방으로 갈 가능성도 많이 있다. 이미 그런 흉내는 김정일 때도 많이 하지 않았나. 김정은은 어쨌든 젊으니까 패기로 밀어붙일 가능성은 있다. 그러나 개혁개방을 하더라도 중국처럼 안정적으로 성공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는 북한 스스로 개혁개방쪽으로 변화의 물꼬를 틀 가능성을 높게 보고 있었다.

북한 내부의 민주화 세력이나 역량은 없을까. 그는 "북한 내에 커다란 민주화 운동조직이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면서도 " 그러나 그런 것을 지향하는 인사들이 적지는 않다"고 말했다.

현 정부의 대북정책에 대해 그는 "애초부터 대북 압박을 하려고 했던 것은 아니지만 금강산과 천안함, 연평도 사건이 터지면서 정부로서는 다르게 해 볼 수 없게 된 점이 아쉽다"며 "노선 측면에서 봤을 때 정부는 유연하고 온건하게 대북정책을 취하고 민간차원에서 강력하게 대북정책을 하는 이런 식의 역할 분담이 바람직하다"고 강조했다.

여러 차례 정치권이 그에게 '러브 콜'을 보냈다. 총선에 출마하라는 권유를 받을 때마다 그는 뿌리쳤다.

"정치를 하는 것도 제가 하는 이 운동의 한 수단이 될 수 있지만 북한 민주화 운동을 주도해 온 상징성이 있는 제가 정치권에 들어가면 순수성을 의심받을까봐 두려웠다. 또 지금까지 주도적으로 해오고 있는 이 역할이 정치권에서 하는 역할보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파란만장한 스스로의 인생을 어떻게 평가하고 있을까.

"잘 살아왔다고 하기는 그렇지만 열심히 살았고 정치적으로 올바른 것인지 아닌지 문제는 제쳐두고, 도덕성을 지키면서 살아왔다는 점에서는 … 그렇다. 정치적으로 판단하기 시작하면 워낙 복잡하고 스스로도 잘못된 결정이 많아 후회스럽기도 하다…."

그가 가장 후회스럽게 여기는 것은 주사파의 대부로서 우리 사회에 친북 분위기를 확산시킨 것에 대한 책임감이었다. 그것이 오늘도 그를 북한 민주화 운동으로 내몰고 있는 것이다.

서울정경부장 diderot@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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