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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춘추] 껌딱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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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여자를 보면 늘 껌딱지가 생각난다. 내 몸에 슬그머니 달라붙어 끈끈하게 날 괴롭히는 껌딱지. 여간 성가신 게 아니다. 날 불쾌하게 만드는 이 부착물은 어떤 강력한 용제로도 녹여버릴 수가 없다. 어쩌면 소리없이 몸을 부식시켜서 날 앙상하게 만들어 버릴지도 모르겠다. 내 몸을 구성하고 있는 세포들은 나보다 먼저 반응을 하고 반사적으로 그녀를 밀쳐낸다. 오늘도 또 전화를 받았다. 피할 수 있으면 피하려고 몇 번이나 애를 써봤지만 이번에도 실패했다. 얼마 견디지 못하고 포기해 버리는 나의 성격을 알기 때문에 그녀는 더 집요해지는 것 같다.

'형제래야 네 남편과 나, 딱 둘뿐이다.' 이렇게 시작해서 이야기 끝은 항상 청구서가 된다. 남편이 가버린 후 생전의 남편의 짐이 이젠 내 것이 되어 버렸다. 나는 그녀의 그런 형식에 넌덜머리가 난다. 그녀의 친절한 안부 전화조차 받기가 두렵다. 얼마든지 피해갈 수도 있고, 그녀를 내 짐이 아닌 것으로 내려놓을 수도 있다. 이런 생각은 오랫동안 큰 유혹으로 나를 손짓했다. 할 수만 있다면 성난 소가 되어 날 교묘히 다루어 보려는 그녀를 힘껏 받아버리고 싶다.

그녀는 투우사고 나는 투우(鬪牛)가 된다. 투우는 투우사의 교묘한 술책, 그가 가지고 나올 다음 전략 등을 이미 다 꿰고 있다. 하지만 내면의 치열한 싸움과는 달리 나의 행동은 항상 지리멸렬하다. 그 잘난 교양과 집어던져 버리고 싶은 도덕심 때문에 나의 분노는 항상 용두사미로 끝난다. 내 마음속의 이런 전쟁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녀는 그 부분을 너무나 당연하게 생각한다. '이번이 끝이겠지. 설마 다음엔 안 그러겠지.' 언제까지 그녀와 같이 가야만 하는 것인지 혼자 마음속으로 헛발질을 해댄다.

얼마 전 철가방 기부천사 김우수 씨의 장례식을 보았다. 살았던 집은 성인 한 명 누울 공간이었고, 재산이라면 월급 70만원과 책상 위의 평소 그분이 후원하던 아이들 사진뿐이었다. 자신의 미래인 종신보험은 기부단체에, 신체의 일부인 장기기증까지 약속할 만큼, 그는 죽어서도 돌볼 사람이 많았다. '소갈딱지하곤, 좀 서로 나눠주며 살면 안 되겠니?'

어느 날 몇만 볼트의 전기에 감전된 것 같은 이 소리는, 귀로부터 온몸을 타고 흘러내리며 내 가슴을 뜨겁게 울렸다. 예수를 안고 있는 피에타상의 마리아로 보이기도 하고, 미소 띤 부처님의 자비스런 모습이 되어 달라고 어르기도 한 것 같다. 늘 빼앗기지 않으려고 부둥켜안고 있는 나에게, 하느님은 어렸을 적 아버지처럼 이렇게 말씀하시고 계신지도 모르겠다. 누가 우리 인생에 재판관이 되어 상대방을 지탄할 수 있단 말인가? 알량하게 티끌 같은 적선을 베풀면서, 없어진 부분만 태산같이 크게 생각했다. 세월은 그녀에게도 나에게도 늙음을 가져다줬다. 저항하지 못할 업이라면 조용히 받아들이는 지혜로움과 겸허함도 함께.

고윤자 수필가·약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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