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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현수의 시와 함께] 나무를 올려다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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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무를 올려다보다 - 엄원태

산길 옆 평상에 드러누워 상수리 숲을 올려다보면

빈 가지들 어우러져 이룬 궁륭은

넉넉히 한 채 성당이다.

나무만큼

침묵을 값지게 실천할 줄 아는 수도사들도 드물다 싶다.

스테인드글라스는 아니지만

잔가지 무늬 창문으로 빗겨드는 햇살은 청빈해서 찬란하다.

이 수도원에선 누구나

차별 없는 사함과 보속의 평화를 얻게 될 것이다.

어쩌면, 까치나 까마귀들이 오래전부터 그걸 알고서

숲에다 제 영토를 마련했는지 모를 일이다.

그 어떤 실체라는 건

늘 이따위 잡념을 통해서만

뒤늦게야 내 것이 되곤 하는데.

겨울 숲의 아름다움은

오로지 묵언으로 제 가진 것 털어내어

기도하듯 팔을 펼쳐 든 나무들의 숭고가 이룬 것이다.

나무들은 영혼이라는 언어를 가졌다.

다람쥐 전령의 봄 소식을

굳이 기다리지 않아도 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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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읽다가 밑줄을 긋지 않을 수 없는 구절을 만나게 됩니다. 그것은 한 생각 깨우치게 하는 구절입니다. 삶의 깊이가 스며들어 있는 이런 구절을 만나면, 비유의 아름다움이나 착상의 기발함 같은 것도 도무소용입니다.

나무들을 쳐다보면서 한 채의 성당 같다고 느낀 시인의 직관도 귀합니다. 그러나 이보다 더 귀한 것은 "그 어떤 실체라는 건/ 늘 이따위 잡념을 통해서만/ 뒤늦게야 내 것이 되곤" 한다는 구절입니다. 잡념을 종교적 깨달음의 경지에 올려놓는 이 사소한 구절! 

박현수<시인·경북대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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