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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상학의 시와 함께] 불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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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우 -강연호(1962∼)

불우라는 말로 생을 요약하기에는 늘 저녁이 길었다

낮잠을 한숨 자고 일어나니 목젖이 눌렸다

밤은 또 왔지만 눈이 가만가만 내려서 차갑게 따뜻했다

손바닥에 묻은 실밥 어둠을 겨우 뜯어낸 뒤 쌀을 씻으면 세상이 사무쳤다

노안이 오래됐으나 멀리서 보는 게 익숙했으므로 당신을 떠올리지 않아도 견딜 만했다

불 앞에 쪼그리고 앉아 말똥말똥 밥물 끓어오르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숟가락이 무거웠다

물그릇에 살얼음이 잡혔다

다시 잠 못 들고 뒤척이면 알전구의 필라멘트가 부르르 몸을 떨었다

자정 너머의 치렁치렁한 그림자를 불우라는 말로 싹둑 접기에는 언제나 생이 무례했다

-계간 '시산맥' 2012년 겨울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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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우라는 말로 생을 요약하기에는 저녁이 너무 길고, 싹둑 접기에는 생이 도무지 말을 들어먹지 않는다는 말이다. 밥을 거르기에는 겨울밤이 길어서 배고픔을 견디기가 쉽지 않고, 생을 싹둑 끝내기에는 목숨 줄이 너무 질겨서 결행하기에는 어려움이 많다는 말이겠다.

불우(不遇)라는 관형어는 대체로 딱한 처지에 있는 사람이거나 뜻을 지녔지만 때를 못 만난 사람을 수식한다. 둘 다 안 되어 보이기는 마찬가지다. 이 시의 주인공도 무슨 사연에선가 그렇게 혼자 살아가는 사람이다. 다행하게도 생을 놓지는 않았다. 절망스럽지만 그래도 살아봐야지 않겠느냐고 무례하게 떼를 쓰는 생에게 눈을 흘기지만 가슴으로는 받아들이는 모습이다. 저리고 시리다. 살아줘서 고맙다.

얼마 전 또 하나의 자살로 이어진 스타 가문의 슬픈 소식이 있었다. 남은 아이들이 안쓰럽다. 불우를 딛고 좋은 날들과 조우하길 다만 바라지만 아닌 게 아니라 이럴 땐 생이 참 무례하다는 생각은 어쩔 수가 없다.

안상학<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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