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인터뷰通] 경제관료에서 선비정신 전도사로…김병일 국학진흥원장

선비정신 참뜻은 헌신·겸손…옛 유물 아닌 현대인 삶 위한 지표

김병일 국학진흥원장이 한국국학진흥원 전시실에서
김병일 국학진흥원장이 한국국학진흥원 전시실에서 '도산서원' 현판에 얽힌 일화(명필 한석봉이 현판 글씨를 썼는데 퇴계 선생의 명성에 기가 눌려 실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했다는 얘기)를 설명하고 있다.
'선비정신은 병든 사회의 치료제다.' 김병일 원장은 선비정신의 전파'보급에 앞장서고 있다.

'풍요 속 빈곤'. 오늘날 대한민국의 자화상이다. 소득이 높아지고 세계 일류 제품을 만들어낼 정도로 물질적으로 풍요로워졌다. 그러나 주위에서 행복한 사람을 만나기란 쉽지 않다. 반목과 불신, 계층간 갈등이 과거보다 심각해지고 있다. 자식이 부모를 믿지 못하고 제자가 스승을 존경하지 않는 사회로 변해가고 있다. '국민불행 시대'란 말도 나오고 있다.

이 시대에 행복은 어디서 찾아야 할까? 그 답을 얻기 위해 김병일(68) 한국국학진흥원장 겸 도산서원 선비문화수련원 이사장을 만났다. 그는 기획예산처 장관을 지낸 인물이다. 김 원장은 "병들어 가는 우리 사회를 치료하기 위해서는 선비정신이 꼭 필요하다"며 선비정신의 전파'보급에 앞장서고 있다. 30여 년간 경제관료로 일하면서 우리나라의 '물질'(살림살이)을 책임졌던 사람이 이제는 우리 민족의 '정신'을 이끌고 있는 셈이다.

◆선비에게 길을 묻다

두루마기가 잘 어울리는 김 원장은 영락없는 선비였다. 손수 만든 차를 내놓으면 취재진을 맞는다. "선비정신은 한마디로 '봉제사접빈객'(奉祭祀接賓客)으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제사를 모시고 정성스레 손님을 맞는 것은 그 자체로 선비정신의 정수라고 할 만하지요. 특히 공적기능인 '접빈객'은 교류와 소통을 통해 정신적 가치를 공유하고 확산하는 계기가 되기 때문에 가장 중요합니다." 정성을 다해 취재진을 맞는 모습에서 접빈객의 의미를 느낄 수 있었다.

"우리 사회는 물질적으로 풍족해졌지만 정신적으로는 피폐해지고 있습니다. 과거에 없던 반목과 갈등, 불신으로 사회가 병들어가고 있습니다. 이를 치유하기 위해서는 이제라도 자신한테는 엄격하면서도 다른 사람에 대해서는 너그럽고 배려하는 선비정신이 절실하지요."

선비정신은 치료제일 뿐 아니라 성장촉진제다. "국가적인 차원에서도 19세기는 약육강식의 원리가 지배하는 제국주의의 시대, 20세기는 산업 경쟁력을 확대하는 시대였다면, 21세기는 20세기의 경제력이라는 가치를 한층 더 성숙시키는 문화의 세기가 될 것입니다." 선비 정신은 21세기 한국이 문화 강국으로 부상할 수 있는 원천이 될 수 있다는 설명이다.

또 사장됐던 선비정신에 현재성을 부여하고 있다. 무조건 '옛 선비들을 본받아 충(忠), 효(孝), 인(仁), 의(義)의 덕목을 따르라'고 말하지 않는다. 대신 현대인이 고민하는 행복, 승진, 경영, 국가전략 등을 선비 정신과 연결시켜 해결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선비정신의 현대화 작업인 셈이다. "선비 정신의 핵심은 자기 마음과 다른 사람의 마음이 같으니 양보하고 하기 싫은 것을 남보다 먼저 하라는 것입니다. 특히 현대적 의미에서 선비 정신의 핵심은 '겸손'과 '헌신'입니다."

◆경제 관료에서 선비정신 전도사

그는 잘나가는 경제 관료였다. 한국의 경제발전을 이끈 옛 경제기획원(EPB)에서 예산총괄과장 등 요직을 거친 뒤 통계청장, 조달청장에 이어 기획예산처 장관에 올랐다. 한국의 경제 관료 중에서 독특한 이력의 소유자다. 경영학과나 경제학과 등 상대 출신과 법대 출신이 우글거리는 옛 경제기획원에서는 드물게 대학에서 사학을 전공했다. 그러나 승승장구했다. 어릴 적 할아버지로부터 몸소 배운 '선비정신'이 큰 힘이 됐단다. "할아버지는 나이 68세에 본 첫 손자이자 2대 독자였던 나를 끔찍이 사랑했어요. 걸음마를 떼기 시작하면서부터 천자문, 사서삼경과 논어를 직접 가르치셨어요. 그때 몸소 체험한 겸손과 헌신의 정신은 평생 나를 이끄는 철학이자 힘이 되었지요."

2005년 기획예산처 장관 시절에는 '스스로 장관직을 못하겠다'고 사표를 써 뭇사람의 시선을 모으기도 했다. '능력 있는 후배가 많은데 나 때문에 승진 등이 정체돼 있다. 1년 동안 나름대로 열심히 했고 이제는 후진들에게 길을 열어 주는 것이 필요하다'는 이유에서다.

그러나 옛 정신에 대한 사랑은 평생을 그와 함께했다. 행정고시에 통과한 후 숫자와 씨름하며 경제관련 부처에서 일했지만 대학 전공인 역사에 대한 관심을 놓지 않았다.

서울대 행정대학원에서 공부할 때는 '조선 청백리 연구'를 주제로 논문을 썼을 만큼 일찍부터 한국적인 것에 대한 관심이 높았다. 경제 관료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와중에도 '뿌리회' '역사모'(역사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 등 다양한 모임을 만들어 한국의 전통문화와 선비정신 등에 대한 탐구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퇴직 후에도 한국사 연구에 기본인 한문을 익히기 위해 논어, 맹자 등 '사서'를 배웠다. 틈틈이 모은 옛 도서 1천여 권 등을 상주대에 기증해 세상을 놀라게 하기도 했다. 이 같은 소식이 알려지면서 안동 유림들로부터 입질(?)이 들어왔다.

"2008년 초 다리를 다쳐 집에서 쉬고 있는데 도산서원 선비수련원 이사회가 만장일치로 나를 이사장으로 선임하고 통보했어요. 처음엔 내 뜻과 무관해 극구 고사했어요. 그러나 유림들의 뜻이 워낙 완강했지요." 자존심 세고 꼬장꼬장하기로 유명한 경북 유림 대표 10여 명으로 구성된 선비수련원 이사회가 현대인의 올바른 선비상으로 그를 선정해 중책을 맡긴 것이다.

◆퇴계처럼…

퇴직 이후 김 원장의 삶은 퇴계 이황을 닮아가기 시작했다. 2008년 선비문화원 이사장, 이듬해 한국국학진흥원장으로 취임하면서 선비정신 전도사로 나섰다. 우리의 옛것에 대해 연구'집필하며 국학진흥원과 선비문화원을 찾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선비정신을 일일이 전파하기 시작한 것. '물러난 계곡'(퇴계'退溪)이라는 호를 스스로 짓고 고향으로 돌아가 도산서당을 짓고 독서와 수양, 저술에 전념하며 제자들을 길러낸 이황 선생의 그것과 닮은꼴이다.

처음에는 자의 반 타의 반이었다. 옛 선비의 삶에 대한 막연한 동경과 필요성을 알고 있었지만 남을 가르칠 수준은 아니었다. 평생을 경제관료로 장관까지 오른 그이지만 막상 두 단체의 수장 노릇을 하다 보니 어쩔 수 없는 측면도 있었다. 그러나 막상 안동에서 선비정신을 묵묵히 실천하고 있는 사람들을 만나고 유적을 보고 느끼면서 선비정신의 진수를 맛볼 수 있었다. 특히 퇴계의 삶에 대해 감명을 받고 공부했다.

"퇴계 선생의 일화, 편지글에서 엿볼 수 있는 모습은 제가 생각했던 것과 너무나 큰 차이가 있었습니다. 우리 역사상 가장 존경받았던 퇴계 선생은 아랫사람에게 섬김과 낮춤의 모습을 보였습니다. 우월한 위치에 있었지만 자신을 낮추고 가까운 사람에게 더욱 고개를 숙이고 받들었습니다." 김 원장은 퇴계 선생의 이런 모습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많은 가르침을 준다고 강조했다.

이후 본격적인 선비정신 전도사로 변신했다. 최근까지 하루 24시간이 부족할 정도로 왕성한 봉사활동을 펼치고 있다. 지금까지 300여 차례 걸쳐 공무원 및 공기업 직원 1만2천여 명을 대상으로 '선비정신'을 특강했다.

지난 연말에는 '퇴계처럼'이라는 책을 내기도 했다. 퇴계의 삶과 철학을 현대적으로 재조명한 것이다. "퇴계 선생을 천원짜리 지폐 인물로 모시면서도 과연 퇴계 선생이 어떤 분이고 어떤 가르침을 줬는지 사람들이 잘 모르는 것 같아 안타까운 마음에 책을 내게 됐습니다."

앞으로도 일반 독자들이 쉽게 읽을 수 있는 교양도서 발간, 조선시대 일기 자료를 이야기 소재로 하는 '스토리 테마파크 사업'을 통해 선비정신과 우리의 옛 이야기를 널리 알릴 계획이다.

◆대한민국이 행복할 때까지

"불안이 일상이 되어 버렸습니다. 학업 스트레스에 힘들어하는 학생들, 취업난에 고민하는 청년들, 바쁜 업무에 지친 직장인들, 언제 직장을 잃을지 몰라 불안해하는 중년들까지…. 우리 사회 곳곳에서 이들의 비명이 터져 나오고 있습니다."

그는 병들어가는 우리 사회를 치료하기 위해 선비정신을 적극 활용할 계획이다. 단순히 선비문화를 보존'유지하고 알리는 데 그치지 않고 불안한 우리 시대를 치유하는 데 선비정신이 나름의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생각에서다. 실제 이를 위해 다양한 사업을 추진 중이다. 그 중 가장 역점을 두고 있는 것이 '아름다운 이야기 할머니 사업'이다. 조손(祖孫) 세대 간의 문화 소통을 통해 미래 세대(유아 및 아동)의 인성을 함양시키고 민족적 정서가 배어 있는 이야기 구연을 통해 미래의 선비들을 길러내는 사업이다. 4년 전 시작한 이 사업은 56세 이상의 '할머니'를 대상으로 하고 있다. 2009년 대구경북에서 '이야기 할머니' 30명을 양성했고, 지난해 600명의 할머니들이 유치원 방문교육을 펼치고 있다. 올해 1천여 명의 이야기 할머니들이 전국 3천여 유치원에서 미래 세대에게 전래동화와 선현들의 미담을 들려주는 이야기 활동을 전개할 예정이다.

또 진흥원 내 보물창고로 불리는 장판각에 보관된 일기류 기록자료들을 선별해 번역하는 '작업과 종가문화 명품화 사업'에도 박차를 가하고 있다. 이 같은 노력이 성과를 거두면서 김 원장 취임 후 국학진흥원과 선비문화수련원을 찾는 사람의 수도 급증하고 있다. 과거 수백 명에 불과했던 수련생은 지난해에만 2만400여 명에 이르렀다. "선비정신을 통해 향후 한국사회가 해피엔딩 사회로 변해가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이 꿈입니다." 선비의 고장, 안동에서 그의 꿈이 영글어 가고 있었다.

최창희기자 cchee@msnet.co.kr

사진'성일권기자 sungig@msnet.co.kr

◆김병일은?=1945년 경북 상주에서 태어나 초등학교 5년 때 상경했다. 1963년 서울 중앙고등학교를 나온 뒤 서울대 사학과와 행정대학원(석사)을 졸업했다. 1971년 제10회 행정고시를 거쳐 재정경제원 국민생활국장, 통계청장, 조달청장, 기획예산처 차관과 장관, 한국개발연구원 자문위원(2005~2008) 등을 역임했다. 황조근정훈장과 청조근정훈장 등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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