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겐 오래전부터 하나의 습성이 생겼다. 그것은 검은 비닐봉지는 좀처럼 사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어떻게 생각하면 좋지 않은 기억의 한 단면일는지도 모르겠다.
집 베란다 한쪽에는 각종 쓰레기를 담기 위해 봉지를 모아두는 곳이 있다. 대부분 주부들이 그렇듯 쓰레기봉투에서부터 물건을 구입한 봉지까지 그야말로 잡동사니로 한 가득이다. 아마도 집집이 검은 비닐봉지 몇 장씩 모아 두지 않는 집은 없을 게다. 버리기가 아까워 그냥 두고 쓰다 보니 크고 작은 일들이 참 많았던 것 같다.
결혼 후 얼마 되지 않았을 무렵, 장기간 집을 비울 일이 생겼다. 부엌일에 익숙지 못한 남편이 냉장고 안을 열어보게 되었다. 이것저것 찾다가 검은 봉지 안에 물컹하게 잡히는 무른 채소를 발견한 것이다. 살림에 미숙한 탓도 있었지만 검은 봉지에 가려져 나도 모르게 날짜를 훌쩍 넘겨버린 식품을 보고 질타를 했다. 솔직히 되짚어 보면 상해서 버린 식품들이 꽤 있었던 것 같다. 남편의 심한 타박에 자존심이 상한 나는 당장 냉장고 청소를 하기 시작했다.
다음 날 아침, 기분 좋게 냉장고 문을 열다가 불현듯 스쳐 지나가는 것이 있었다. 큰일을 저지르고 만 것이다. 온 집안을 다 뒤져도 보이지 않는 것이 있었다. 분명히 있어야 할 것이 없어지니 속이 다 탔다. 기억을 더듬어 보니 내다버린 검은 봉지 하나가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그래도, 혹시나 하는 생각에 서울서 김 서방 찾기라도 하듯 뒤죽박죽 쌓인 쓰레기를 뒤지기 시작했다. 예전의 아파트는 요즘처럼 따로 쓰레기를 분리하지 않고 가구마다 벽면에 쓰레기 투여구가 있어 바로 버릴 수 있게 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그 많은 가구의 쓰레기를 뒤져 문제의 검은 봉지 찾기란 예삿일이 아니었다. 더군다나 내 것이라고 이름을 적어놓은 것도 아니고, 집집이 떨어뜨린 검은 비닐봉지와 격한 냄새에 다시 찾는 것은 포기해야만 했다. 졸지에 가만히 앉아서 결혼 패물을 모두 버린 셈이 되었다.
그날 이후, 나는 모든 검은 봉지를 냉장고에서 빼내고 쉽게 눈에 띄는 투명비닐을 크기별로 사서 정리를 한다. 지나간 일화지만 검은 봉지만 보면 그때의 기억이 되살아난다. 지금쯤 땅속 어디엔가 깊이 묻혀 있을 수도, 또는 용케도 누군가의 손에서 빛나고 있을 수도 있으리라. '새벽 길쌈 잘하는 년 사타리 옷만 입는다'고 내 속도 모르고 살림 잘한다는 말을 들을 때마다 허전한 손가락을 바라본다.
어쨌든 나는 뜻하지 않은 일이었지만 긍정적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누군가에게 보시(布施)를 한 것으로- 그렇게 말이다.
윤경희<시조시인 ykh6463@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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