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장관 내정자의 국적 때문에 말들이 많다. 사실 국적이야 이중으로도 있을 수 있고 필요에 따라 언제든지 바꿀 수도 있다. 그래서 '국적은 바꾸어도 학적은 바꿀 수 없다'는 말이 등장했다. 동창들 간의 연대를 강조할 때 쓰는 말이다. 그렇다면 바꿀 수 있는 '국적'과 바뀔 수 없는 '학적'은 무슨 차이가 있을까? 국적은 개인의 현재 상태이고 학적은 개인의 역사다. 현재의 상태란 것은 늘 변할 수 있지만 지나간 역사는 절대 바뀌지 않는다. 그런데 정말로 역사는 바뀌지 않을까?
1985년 봄, 경북대 의과대학을 졸업할 때 사람들은 우리 졸업생들에게 53회라고 했다. 그 후로 그 숫자는 항상 선후배를 만날 때 명찰처럼 따라다녔다. 그러다 보니 내게는 그 숫자가 출생 연도만큼이나 부동의 의미를 갖고 있었고 감히 의심할 수 없는 대상이었다.
그렇게 졸업 후 삼십 년 가까이를 지내왔다. 지난해 가을부터 매일신문사에서 '대구 의료 100년'을 준비한다고 여기저기 자료를 구하러 다녔다. 의료사특별위원회도 구성되고 어떤 이는 사료를 수집하러 일본에도 다녀오곤 했다. 본래 역사에 큰 관심이나 식견이 없던 나는 그저 옆에서 지켜보며 큰 도움이 못 되는 것을 미안해할 따름이었다. 그랬는데 열흘쯤 전에 건축사를 전공하는 김주야 박사가 규장각에 있던 자료에서 흥미로운 것을 발견했다고 연락이 왔다.
만나보니 과연 놀라웠다. 경북대병원이 설립 기점으로 잡고 있는 대구동인의원의 개원 연도와 같은 해인 1907년 10월에 '대구동인의학교'를 설립하는 예산을 연간 5천400환(현재 약 5억원) 책정해 대한제국 정부 각료회의에서 가결하고 순종의 결재를 받은 서류였다.
더욱 놀라운 것은 한글로 쓰여 있다는 점이었다. 예산의 세부 내용으로는 교수 기기 및 서적 구입비, 학용환자 진료비, 기숙사 사감 월급, 학생 수업료 및 생활비 등이었다.
문헌에 따르면 1907년 대한제국에서 시작된 학생 교육은 1910년 한일강제병합으로 '공립 대구동인의원'이 대구자혜의원으로 개편된 후에도 계속됐다. 그러나 1911년에 급증하는 환자들로 교수들의 임상업무가 늘어나자 결국 학생들을 서울의 의학강습소로 전학시켰다.
그다음부턴 지금껏 우리가 아는 역사다. 1923년에 다시 조선총독부 인가를 받아 대구의학강습소를 개설했고, 1933년 대구의학전문학교로 승격됐다. 이때가 비로소 나의 53회를 만들어 내는 기점이다. 사실 기점이 중요한 것은 아니지만 '개교'와 다른 '개학'의 의미도 있을 수 있다. 한글로 쓰인 대한제국 순종의 승인과 일본어로 된 조선총독부의 인가가 주는 의미가 각각 다를 수 있다. 그렇다면 도대체 바뀌지 않는다는 내 학적의 뿌리는 질곡의 역사 속에서 과연 어디쯤 있는 것일까?
정호영 경북대병원 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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