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동인회는… 대륙침략 과정 의학 보급 명분, 의료 혜택 미끼 민중 반발 무마

동인회는 일제가 조선과 중국 등 대륙 침략 과정에서 의학 보급을 명분으로 내세운 민간단체 중 하나였다. 앞서 동아동문회(東亞同文會)와 아세아의회(亞細亞醫會) 등이 생겼다가 1902년 6월 동인회로 통합'창립됐다. 1904년 제2대 회장으로 취임한 오쿠마 시게노부는 일본 전국에 동인회 지부를 설치하고, 사업 범위를 넓혀 조선'중국 등지에 의사를 파견했다.

중국에는 한구의원'제남의원'청도의원'북경일화동인병원 등이 세워졌고, 우리나라에선 대구와 평양에 동인의원, 용산철도병원 등이 문을 열었다. 1912년까지 의사 329명이 조선은 물론 홍콩'방콕'싱가포르 등지까지 파견됐다.

경북대병원 사에는 '동인회의 의료 활동은 지금까지 위생 상태가 극히 불량해 질병의 고통에 시달려왔던 중국과 조선의 민중에게 근대적인 의료기기와 약품을 이용한 의료 혜택을 베풀어, 민중의 복지를 크게 향상시켰던 것으로 미화 선전돼 왔다. 그러나 이는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 논리 가운데 하나였던 이른바 문명시혜론(文明施惠論)에 지나지 않는다'고 나와있다.

동인회는 일제가 침략 정책을 원활하게 추진하기 위해, 피 침략 지역의 민중들에게 의료 혜택을 제공한다는 명분으로 침략을 지원하고 민중들의 반발을 무마시키려 했던 고도의 기만정책에서 창립된 민간단체였다는 것이다. 실제로 동인회 재원은 자발적인 기부금보다는 일제의 국고 보조에 의지했으며, 주요 임원진 중에 정부 요직자들이 대거 포진하고 있었다.

근대 의술과 약품을 제공한 동인의원에 조선인도 상당한 혜택을 받았다. 하지만 조선인들의 감정이 반드시 호의적인 것은 아니었다. 제2대 평양동인의원 원장을 지낸 사토 고죠가 1907년 평양에 부임한 직후 경험담이다.

"당시 평양동인의원에 미국인 의사에 의해 무릎 아래쪽 절단 수술을 받았던 중년의 조선인 환자가 매일 붕대를 교환하러 병원에 왔다. 내가 젊게 보였는지 통역을 통해 어떻게 여기에 오게 됐는가를 물었다. 나는 일본의 진보한 의료 기술로 당신 나라의 병든 사람을 치료하고자 도쿄의 동인회에서 명을 받고 왔다는 취지로 대답했다. 그랬더니 환자는 '그것이 아니겠지요. 당신 나라는 우리나라를 빼앗으려고 하는 것이지요?'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당시 큰 사건이 일어나고 있던 수도 경성(京城)에서 본 평양은 매우 평온한 상태였다. 그러나 동인병원에는 자주 밤중에 돌이 날아들어 창문을 부술 정도였다."

김수용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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