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명정酩酊 -임병호(1947~2003)
한 닷새쯤 오욕의 땅 밟지 않고
기차에 올라 휘 한 바퀴 돌아올 수 있는 땅을
한 번 찾아가 보았으면 좋겠다
엉긴 피 같은 노역의 홑옷 벗어 던지고
생채기뿐인 양단의 사슬 풀어버리고
외딴집 찌든 처마며 삽짝이며 토담쯤 잠시 잊고
서 말쯤 막걸리라도 들여놓고
낯선 사람들 틈에 끼어 앉아
구름 걸린 높다란 하늘쯤 얘기하며
술잔이나 건네다가
삼일장취三日長醉의 명정酩酊에나 들었으면
좋겠다
들꽃이 두 눈 가득 흐드러지게 피어나고
소나기 퍼붓듯 차창을 때리고
흰 눈이 살같이 흐르는
그런 시속時速쯤으로
광활한 대륙을 돌아들면 좋겠다
모두들 제 삶의 모습으로
쓰러지고 엎어져 꿈속에나 빠져 헤맬 때
툭툭 몸 털고 몇 번 눈이나 부비며
한 닷새 큰 수리처럼 머물렀던
기차를 배웅할 수 있는 큰 땅이
내 사는 곳에 있었으면 참 좋겠다.
-추모문집 『눈물이 나서 자꾸 눈물이 나서』(영남사,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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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는 5월 1일은 임병호 시인 10주기다. 한국현대사의 질곡 속에 고스란히 노출된 불행한 가족사, 그 안에서 온갖 정신적, 육체적 고통을 감내하며 이 악물고 살았던 그였다. 술과 시는 그가 말문을 열고, 마음을 트며 지낸 의지처의 전부였다.
나는 일기 한 줄 쓰지 않던 누이가 암 투병 말기에 쓴 글을 읽고 펑펑 운 적이 있다. 고통을 견디는데 누구보다도 위로가 되었던 게 글이었다는 것을 알았다. 술을 마실 형편이 되었다면 누이도 어쩌면 그리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이 시는 임병호 시인의 여러 시편들 중에서도 가장 그와 가깝다. "한 닷새쯤 오욕의 땅을 밟지 않고" 살고 싶어 한 그의 꿈은 죽을 때까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10년이 갔다. 안 보이는 것을 보면 이 땅을 떠난 게 분명하다.
안상학<시인 artandong@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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