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찮게 다리에 깁스를 하게 되어 친구들이 문병을 왔다. 말이 좋아 문병이지 핑계 김에 한번 뭉쳐 회포라도 풀자는 심사가 역력하다. 야간수업으로 시간이 빠듯한 대학 선생들까지 스스로 참석을 우기는 걸 보면 우리도 어느덧 친구 좋은 나이가 된 모양이다.
일 가진 여자들은 시간을 칼같이 쓰는 습관이 은연중 몸에 배어 있다. 조금 일찍 도착한 주모자가 깁스한 나의 다리는 보는 둥 마는 둥하며 사들고 온 맥주를 냉장고에 넣기도 하고 만두를 찌기도 하며 부산을 떤다. 식탁에서도 문병은 구렁이 담 넘어가듯 하고 모인 친구들의 공통분모인 대학입시로 화제가 넘어간다.
수시모집과 대학홍보의 어려움을 이야기하다가 한 친구가 오늘 쓴 경비 계산하자며 지갑을 꺼내는데, 모두의 시선이 가방으로 쏠린다. '에르메스'(Hermes) 가방이다. '그레이스 켈리'(Grace Kelly)가 공식석상에서 임신한 배를 가리느라 들었다고 해서 켈리 백이라는 이름이 붙은 그 가방은 1천만원 이상을 호가한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가짜 학위로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S여교수가 들고 나와 화제가 되었던 바로 그 가방이다.
주위가 잠시 술렁거렸다. 하나같이 월급 타서 적금 드는 소시민으로서는 뉴스에나 나오는 그 가방이 낯설고 기이했던 것이다. 누군가가 얼마 주고 샀느냐고 물었다. 가방 주인이 생긋 웃으며 가짜라고 실토를 한다. 가짜 중에서는 고급이라 무리를 좀 했다면서.
저녁을 먹고 나자 한 친구가 TV를 틀었다. 9시 뉴스 시간이었다. 공교롭게도 기획특집으로 가짜 명품 소식이 보도되는 중이었다. 한국 여성들이 명품을 얼마나 선호하는지 바야흐로 한국이 가짜 명품의 천국에 진입했다는 소식이었다. 카메라를 따라 허름한 공장을 가보니 상표만 붙인 가짜들이 포대에서 쏟아지고 있었다. 취업 준비 중인 한 젊은 아가씨는 거리 인터뷰에서 면접을 위해 가짜 명품이라도 두어 개 준비하는 것은 상식이라고 말했다.
진짜와 가짜가 어떻게 다른지 우리는 알지 못했지만 친구의 가짜 가방은 정말 예뻤다. TV를 보는 동안 너도나도 가방을 들었다 메었다 해 보느라 뉴스가 산만하게 헝클어지고 있었다. 화제 또한 뒤죽박죽이 되어, 여러 사람이 동시에 말하다가도 아무도 말하고 있지 않기도 했다.
돌아갈 시간이 되자 가방 주인이 새로 산 가방을 들고 일어났다. 다시 보니 가짜처럼 보이기도 하는 가방이었다. 그러나 여전히 S 여교수처럼 가짜 교수의 진짜 명품이 문제인지, 친구처럼 진짜 교수의 가짜 명품이 문제인지는 우리들 마음속에 숙제로 남았다.
소진/에세이 아카데미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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