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좋은생각 행복편지] 오리할아버지의 퇴임식

'오리할아버지'라는 별칭을 가지고 계신 분이 계세요. 그분을 아는 사람들이라면 누구신지 다 아실 거예요. 다들 오리할아버지라고 즐겨 부르니까요. 물론 그분도 자신이 오리할아버지로 불리는 걸 좋아하시죠. 시인이신 김선굉 선생님은 오리할아버지라는 별칭을 얼마나 좋아하시는지 '나는 오리할아버지/ 세상에서 가장 어설픈 몸을 가진/ 세상의 모든 오리들의 할아버지/ ~중략~/ 저 녀석들이 굉굉괴앵, 하지 않고/ 괘액괘액, 하는 것은 할아버지 존함 그대로 부르기가 좀 뭣해서/ 제 딴에는 약간 비틀어 부르는 것이다.'(김선굉 시인의 '오리가 올 때가 되었다' 중에서) 이런 시까지 쓰셨지요.

꽤 오래전 여름시인학교 교장 선생님으로 만난 오리할아버지를, 그해 시인학교를 관장하는 시인인 줄만 알았지요. 한데 알고 보니 당시 교단에 계신 분이셨고 몇 년 후에는 교장으로 승진하셨지요. 어쩐지 교장이라는 직함이 참 잘 어울린다 싶었는데 말이죠. 그분과 지인으로 연을 맺은 지도 십여 년이 되어 가는데요. 저를 만나면 한결같은 목소리로 "쌀뜬물 새댁(제 이름이 '쌀米자 강江자'이니 직역하면 딱 그리 되지요), 밥은 먹고 다니나? 굶지 말고 밥 잘 먹어야 잘 사는 거래이" 하시곤 했어요. 그런 오리할아버지의 첫 물음에 "아니요. 아직 못 먹었어요" 하면 "이런 우짜노, 밥 먹으러 가자"며 괜찮다는 저를 식당으로 데려가 기어이 밥을 사주시곤 하는 자상한 분이시죠.

그 오리할아버지께서 얼마 전, 구미 인동고등학교를 끝으로 교직생활을 마치셨어요. "외부인들 초청 안 하고 그냥 조용하게 하니 오지 말라"는 전언이 있었지만, 평생 바친 교단을 내려오시는 그분의 아쉬움을 함께 나누고 싶어 하는 몇몇 지인들과 참석을 했지요. 강당은 북적대는 시장 같았는데, 그 북적임이 순간 함성으로 바뀌는 거예요. '뭐지?' 하고 주위를 둘러보니 오리할아버지가 무언가를 목에 걸고 퇴임식장으로 들어오시는 거예요. 자세히 들어보니 그 함성에는 "교장 선생님 사랑해요, 오리할아버지 사랑해요." 뭐 이런 소리가 뒤섞여 있더군요. 사실 저도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 다녀봤지만 담임선생님이면 몰라도 교장 선생님한테까지 '사랑해요'라는 말은 해본 적도, 들어본 적도 없어서요. 참 의아했죠. 오리할아버지의 목에는 노란색 오리 모양의 커다란 엽서 같은 것이 걸려 있었는데 하도 궁금해서 식이 끝난 후 가까이 가서 보니 깨알같이 쓴 학생들의 편지였어요.

'오리할아버지 제가 만난 교장쌤 중에 가장 최고셨어요, 할아버지 보면 제 외할아버지의 추억이 떠올라 1년 반 동안 좋았어요, 오리할아버지는 제가 본 교장 선생님 중에 제일 학생을 챙겨주시는 선생님이셔요, 인자하신 모습 절대 잊지 않겠습니다, 제가 만나본 선생님 중 최고예요' 등등. 아이들의 마음이 구구절절이 깨알같이 적혀 있었어요. 심지어는 '저를 버리고 가시는 님은 십리도 못 가서 발병 나요. 가지 마세요 ㅠㅠ' 하는 귀여운 협박성(?) 글이 있는가 하면 '할아버지가 하는 모든 이야기는 재밌고, 아침밥 먹으라고 하시는 것도 너무 맘에 들어요'. 이런 흐뭇한 글도 있었어요. 하여간 보는 사람마다 밥 챙겨 먹으라는 말씀은 꼭 하고 다니시더군요. 이 글만 보더라도 오리할아버지가 얼마나 아이들에게 좋은 교장 선생님이었는지 알겠더라고요.

퇴임식에서는 오리할아버지와의 헤어짐을 아쉬워하는 학생들의 마음을 더 많이 읽을 수 있었는데요. 퇴임식이 아니라 학교 축제처럼 아이들의 춤과 노래로 채워지는 거예요. 노래는 어떤 아이돌그룹의 노래인 듯한데 '누구보다 아파해주던 그대가 있어~' 뭐 이런 가사가 들렸어요. 가사에서의 '그대'가 오리할아버지인 듯, 그 느낌이 가슴으로 전해지더군요. 그러다 스무 명의 아이들이 우르르 나와서는 아이돌댄스를 하고. 도대체 울렸다 웃겼다 하는 통에 정신이 하나도 없었어요. 식전행사 격인 아이들의 노래와 춤이 끝나고 본격적인 퇴임인사와 답사가 이루어졌는데 답사하는 선생님도 학생도 우는 통에 내빈으로 간 나도 덩달아 눈물을 흘렸지요. 마지막으로 한 학생이 나와서 '인연'이라는 노래를 부를 때는 거의 감동이었지요. 우리가 아주 어릴 적 졸업식에서나 보던 광경이 스승과 제자의 간극이 자꾸만 벌어지고 있는 이 시대에 펼쳐지니 말이에요.

단밀중학교 교장 선생님일 때는 아이들을 위해 더운 여름철 시원하게 지내라고 풍덩풍덩 놀 수 있는 연못을 만들어주시더니, 선주중학교에서는 학교가 아파트로 둘러싸여 삭막하다며 학교숲을 손수 만드시더니, 인동고등학교에서는 학교 뒷산으로 오르는 '하늘빛길'을 만드셨던 오리할아버지. 자연이 곧 스승이라며 자연과 아이들이 가깝게 지낼 수 있도록 마음을 쓰시던 오리할아버지 같은 교장 선생님이 내게도 계셨다면 학창시절이 더 행복하지 않았을까 하는 부러움이 퇴임식 내내 들었습니다. 아무튼 오리할아버지의 퇴임식은 연못에서 노는 한 무리의 오리들처럼 왁자지껄했습니다.

권미강/뮤지컬 '바람이 불어오는 곳' 홍보프로듀서 kang-momo@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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