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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칼럼] 전시 도슨트(docent·미술관 안내인)의 부작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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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 스포츠에 별 관심이 없고 TV도 없는지라 스포츠 중계를 볼 일 또한 거의 없다. 하지만 지금은 월드 스타가 된 김연아 선수가 한국 피겨의 기대주로 매 경기 언론의 집중적인 관심을 받던 시절, 우연히 그녀의 경기를 보게 되었다. 한마디로 충격이었다. 그녀의 우승 여부, 점수 이런 걸 떠나 내가 알던 피겨의 상식이 깨지는 순간이었다. 그건 더 이상 운동경기가 아니라 '예술'이었기 때문이다.

이후 각종 인터뷰 기사를 살피며 무엇이 오늘날의 김연아 선수를 있게 했는지 찾아보던 중 그녀의 전 코치인 브라이언 오셔의 인터뷰를 보고서야 고개를 끄덕이게 되었다. 그가 밝힌 인터뷰 주요 내용은 이러했다. "처음 그녀는 행복한 아이가 아니었다. 아사다 마오의 벽을 넘기 위해 트리플 악셀을 배우러 내게 왔지만 이미 배울 시기를 놓쳐버렸다. 하지만 그녀의 장점을 살린다면 최고가 될 수 있을 것을 직감했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김연아 선수의 장점은 정확한 기본기와 예술로까지 승화시킨 표현력이다. 하지만 이 모든 것들을 위해 그가 가장 먼저 연아에게 가르친 것은 "피겨를 즐기게 하는 것이었다"고 회고했다.

스스로 즐기며 하는 것은 그 자체가 놀이가 되고 힘들어도 고통이 되지 않는다. 즐거움을 느끼지 못하는데 무한대의 인내심만을 막연히 강요한다면 그 시작의 부푼 기대와 희망은 사라지고 의무와 강요만 남아 스스로 방향성을 상실하게 된다. 그러면 그 일에 대한 필요성도 함께 사라진다.

미술관에 단체 관람을 예약하는 인솔자는 대부분 전시 설명 가능 여부부터 확인한다. 언제부턴가 미술관이 제공해 온 이 서비스는 어느새 현대미술에 있어 관람객의 자율적인 감상 능력을 마비시켜 버렸다. 누군가의 도움이 없으면 스스로 감상할 수 없는 것으로 현대미술을 만들어버렸다. 물론 박물관에선 도움이 필요하다. '아는 만큼 보인다'란 말은 최소한 박물관에선 진실이다. 과거의 역사, 사회적 배경 이런 것들이 작품 이해에 큰 도움을 준다.

하지만 현대미술관에서는 꼭 그렇지만은 않다. 현대미술이란 동시대의 아직 정확히 언어로 규정되지 않았지만 현재 드러나는 현상들, 이전과 달리 변화된 대상에 대한 시각 이런 것들을 새롭기에 어찌 보면 우리에게 생소한 방법으로 드러내는 것이다. 그것들은 대부분 아직 논리보다는 가슴으로, 느낌에 공감해 줄 것을 호소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많은 욕심을 버린다면 한 전시에서 감상자가 단 한 점의 작품에 끌림을 느꼈다면, 그건 대단히 행복한 상황이 된다. 그 끌림은 그 자리에서 해답을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한동안 감상자가 자신과 주변을 둘러보며 생각에 빠지게 되는 화두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타인의 천 마디 작품 설명보다 스스로 떠올린 단어 하나가 훨씬 더 가치가 있는 것이다.

나는 우리 미술관에서 가능하면 도슨트 서비스를 제공하지 않으려고 한다. 그래서 불만인 분들께 번번이 짧게나마 이유를 설명해 드려야 한다. 어설픈 도슨트는 되려 관람객에게 깊은 오해만을 남긴다. 물론 도슨트가 필요한 경우도 있다. 어린이들에게는 작품에 집중하도록 적절한 동기 부여를 제공하고 그들의 천진난만한 호기심에 대답해 줄 필요가 있다. 이 또한 주입이 아닌 스스로 보고 느낀 것을 얘기하고 학습에 필요한 객관적 사실을 전달하는 마당이 되어야 하지, 타인의 느낌과 감상 방법을 강제하는 자리가 되어서는 안 된다.

현대미술을 본다는 것은 언어로 이해하고 논리로 배워야 가능한 고통스러운 것이 아니라, 내 생각과 몸에 반응해 새로운 가치와 모습에 눈을 떠, 삶의 성취감과 감동으로 새롭게 태어나는 기쁨을 맛보는 것이다. 좀 낯설지만 새로워서, 혼자 바라보고 문득 예기치 못한 단어와 영상이 떠오름이 즐거워 미술관으로 향하는 변화된 발걸음을 기대한다. 내가 타인과 다르듯이 무수한 다름을 존중하고 스스로 즐기는 자세가 우리 사회에 자리 잡을 때, 요란한 구호가 없어도, 문화의 르네상스는 저절로 꽃피게 되는 것이다.

이두희/우양미술관 큐레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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