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별별 세상 별난 인생] 난에 빠진 컴퓨터 서비스맨 김성환 씨

고객님댁 출장가서 난 키우는 얘기 더 할 정도

난은 예부터 군자와 선비정신을 상징해왔다. 그래서 사군자의 하나로 칭송돼 왔고, 수많은 시인묵객들이 난을 치고 노래하고 사랑해왔다. 난은 흔하지만 만만하지 않은 화초다. 난분 하나 없는 집도 드물지만 난 한 번 죽여보지 않은 사람도 없을 정도다. 그래서 난은 일반적으로 기르기 힘든 까다로운 화초로 알려져 있다. 컴퓨터를 수리하고 고치는 일을 하는 김성환(39) 씨는 요즘 난에 푹 빠져 산다. 그는 "난은 키울수록 매력 있고 행복을 주는 화초"라고 말한다.

◆난, 키울수록 오묘한 매력 덩어리

대구 수성구 지산동 수성소방서 건너편 난 연구소 '관유정'. 난실(蘭室)에는 푸른빛을 머금은 수만 분의 난이 자라고 있다. 그곳에 25㎡ 정도 되는 김 씨의 난 배양장이 있다. 김 씨가 올 5월 마련한 난실이다. 그곳에는 300여 개의 난분(蘭盆)이 있다. 종류만도 수십 종류다. 모두 춘란(春蘭)으로 김 씨가 배양했거나 사 모은 것들이다.

김 씨는 하루에 세 번 이상은 이곳에 온다. 아침 출근길, 점심시간, 퇴근 후에도 난실에 들러 난을 돌본다. 일하다 난이 보고 싶으면 언제든지 달려간다. 그래서 김 씨는 3일 이상 외출이나 여행을 떠나지 않는다. 난이 신경 쓰이기 때문이다. 김 씨는 "사랑하는 사람을 하루라도 못 보면 보고 싶듯 난도 똑같다"며 "난도 여자처럼 사랑하고 신경 써서 관리해주면 잘 자란다"고 했다.

김 씨는 난은 키우면 키울수록 오묘한 화초라고 말한다. 다년생초인 난 한 촉의 수명은 대개 5~8년. 수년간 정성을 들여야 작품이 나온다. 같은 화분에서 갈라져 나와도 기르는 사람에 따라 분위기가 전혀 달라질 수 있다는 것. "기르는 사람이 정성을 다하지 않으면 이를 알기라도 하듯 어딘지 품새가 다르다"고 했다.

◆들여다보고 있으면 '몰아지경'

그는 난의 매력을 한마디로 설명하기 어렵다고 했다. 사시사철 푸른 자태는 옛 사람이 말하듯 절개를 상징하는 사군자(四君子)의 모습 그대로 고고하다고 했다. 또 한없이 자랄 듯하다가도 결코 과함이 없이 어느 선에서 성장을 중지하는 모습에서는 소박함을, 우아하면서도 날렵한 곡선을 자랑하는 잎이 큰 것과 작은 것, 서 있는 것과 누운 것이 어긋남 없이 조화를 이룬 모습에서는 어우러짐을 배운다고 했다. 그런 난을 물끄러미 들여다보고 있으면 머릿속에 있던 온갖 잡생각이 사라진다고 했다. 때로는 몰아지경(沒我之境)을 경험하기도 한다고 했다. 중국 춘란은 그윽한 향기가 특징이고, 일본 춘란은 화려한 색과 무늬가 장점이다. 그에 비해 한국 춘란은 일본 춘란처럼 향은 없지만 단아한 자태에서 풍기는 청초한 인상이 매력이라고 했다.

"잎의 색깔, 특히 잎 위 무늬의 대비나 자태를 따지면 중국이나 일본의 것보다 한국 춘란이 훨씬 우수합니다. 예쁜 거 좋아하는 일본 사람들이 우리 한국 춘란을 오히려 많이 가져갑니다. 난은 작은 것일수록 좋은데, 한국 춘란이 중국이나 일본 것에 비해 작으면서 맵시가 있거든요."

김 씨는 난은 언제 보아도 좋지만 특히 봄 신아 때가 가장 예쁘다고 말한다. "화분 속 작은 흙더미로부터 빼꼼히 고개를 내민 투명한 새 촉을 접하면 한없이 행복하다"고 했다.

◆아이 탄생에 맞춰 꽃 피워

김 씨는 1999년 겨울, 처음 난을 접했다. "사무실 오픈 축하 화분으로 들어온 동양란 화분이 여러 개 있었는데, 날씨가 추워 바깥에 두면 얼어 죽을까 봐 집으로 가져가 보살피면서 정이 들었다"고 했다. 그 후 난 키우는 데 재미를 붙이면서 한두 분씩 구입하는 등 화분을 늘려나갔다. 그러다 2007년 첫째 아이가 태어났는데 때맞춰 난이 꽃을 피웠다는 것. "아이 탄생을 축하하는 것 같아 기분이 좋았어요." 2009년 둘째가 태어났는데 또 꽃이 폈다. 이번엔 3개 중 2개가 꽃이 폈다. "우연의 일치치고는 너무 신기했어요. 기쁨과 행복을 가져다주는 난을 키우기로 결심했습니다."

이대건 난초 명장으로부터 강의를 들으면서 난 공부에 푹 빠졌다. 화분도 늘어 베란다 공간이 부족했다. 마침내 올 5월 이 명장 난 아카데미 관유정에 배양장을 임대했다. 본격적으로 난 키우기에 돌입한 것이다.

그가 키우는 난은 한국 춘란이다. 춘란은 봄을 알리는 꽃이라 '보춘화'(報春花)라고 하며 이른봄 꿩이 꽃봉오리를 따먹는다고 해서 '꿩밥', 그리고 '아기다래 여달래'라고 부르기도 한단다. 춘란의 꽃말은 미인이며 잎은 잎대로 나긋나긋한 미인으로서 손색이 없고 꽃은 그 형태와 색깔과 향기마저도 맵시 있고 우아하며 맑기 또한 이를 데 없단다.

김 씨는 난을 통해 배울 점이 많다고 했다. 난은 자라는 환경이 열악해지면 묵은 촉부터 잎이 진다. 다른 식물은 새 촉부터 말라죽기 시작하나 난은 묵은 촉부터 차례로 죽는다는 것. "잎이 지고 나면 벌브만 남게 되고 그 벌브는 영양 저장고가 되어 남아 있는 자손들을 돌보는 역할을 맡게 돼 신기하다"며 "감정이 없는 풀이지만 이쯤 되면 예사롭게 보이지 않아요. 자식이나 자손을 귀히 여기는 사람과 통하는 바가 있기에 난을 신중하게 기르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김 씨는 난은 청초한 자태를 보여주지만 무엇보다 1년 내내 즐길 수 있어 좋다고 했다. 눈, 비에 관계없이 사계절 내내 난을 감상할 수 있고, 꽃이 지는 시기에는 잎 자체만으로도 특유의 운치를 즐길 수 있다는 것.

덤으로 얻는 재미도 있다고 했다. 난을 키우는 수준이 어느 정도 되면 꽤 쏠쏠한 수익을 올릴 수 있다는 것. 한국춘란의 경우 1년에 불어나는 게 30~40% 정도 된다고 했다. 김 씨는 전에는 오토바이 레이스를 즐겼지만 지금은 난 기르는 것이 유일한 취미다. 지인들에게 난을 선물하기도 한다. 아내 역시 처음에는 반대했지만 지금은 '딴짓' 안 해 좋아한다고 했다. 컴퓨터를 수리하러 가서 집주인에게 난 관리법 등을 얘기해주면 자연스레 대화가 된다고 했다. "난 배양장에 있으면 맘이 편해져요. 그냥 바라만 보고 있어도 웃음이 나오고 행복해집니다."

사진'박노익 선임기자 noik@msnet.co.kr

최신 기사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