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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송기의 우리말 이야기] 스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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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에 대학 수시 원서 접수가 끝났다. 고3 담임을 하면 수시 기간만큼 괴로운 때가 없다. 입시 상담을 해야 하는 건 둘째 치고, 입학사정관 전형에 지원하는 학생들의 자기소개서를 봐 주고, 추천서를 쓰느라 정신이 없다. 요즘엔 대학에서는 추천서가 10% 이상 일치하면 불이익을 줄 수도 있다고 하여 반에서 똑같은 일을 한 학생들이라도 추천서에는 각각 다르게 적으라고 하니 일은 훨씬 더 많다. 입시에 미치는 영향은 미미한데, 떨어지면 추천서 때문이라는 원망을 들을 수도 있으니 이것보다 더 보람 없는 일이 없다. 그래서 요즘에는 고3 담임을 하면 자연스럽게 학력고사 선지원 후시험 예찬론자가 된다.

사실 입학사정관 전형은 학생들의 능력을 종합적으로 평가한다는 점에서는 장점이 있는 제도이다. 그렇지만 그 종합적인 것이 너무나 불명확해서 학생들에게 무엇을 열심히 하면 대학을 잘 갈 수 있다는 명확한 신호를 주지 못한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예전에는 학교 공부만 열심히 하면 된다는 명확함이 있어서 밤하늘의 별을 방향 삼아 그 길을 따라가면 목적지가 나오는 것과 같았다. 그런데 지금은 다른 학생들에 비해 두드러지려면 공부만 가지고는 안 되고, 남들보다 더 많은 봉사활동이나 체험활동, 수상 기록, 실적물 등이 있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어느새 표준어처럼 사용되는 '스펙'이라는 것이다.

원래 '스펙'이라는 것은 영어 'specification'에서 유래한 말로 주로 물품의 사양이나 명세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그러다 대학생들이 취업을 하기 위해 갖추어야 하는 학점, 공인 외국어 성적, 자격증 등을 말하는 개념으로 사용되었다가 현재는 다양한 경험이나 경력도 포함하는 좀 넓게 사용되고 있다. 국립국어원에서는 '스펙'을 '공인자격'으로 순화할 것을 제안했는데, '스펙'의 개념이 넓어지면서 '공인자격'으로 순화하기는 어려워진 느낌이 든다. 그리고 스펙을 쌓는 것을 '깜냥 쌓기'라고 순화할 것을 제안했는데, '깜냥'이라는 말은 어감이 좋지 않아서 "깜냥도 안 되는 것이…"와 같이 부정적인 상황에 더 많이 쓰이기 때문에 순화어로서 호응을 받기는 어렵다. 그런데 "이력을 쌓다.", "이력이 화려하다."와 같은 말에서 보면, '이력'이라는 말이 현재 사용하고 있는 '스펙'이라는 말이 가리키는 범위와 거의 일치한다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스펙'이라는 말을 대체하기 위해 '공인자격'이나 '깜냥'이라는 말을 끌어올 필요 없이 '이력'이라는 말로 대체하는 것이 좀 더 현실성 있는 방안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대학의 입학사정관들은 이력'만'을 보지'는' 않겠다고 한다. 그렇지만 그 말은 학생들과 학부모들을 더욱 혼란스럽게 만드는 경향이 있다. 만약 이 학생은 이래서 합격시켰고, 이 학생은 이래서 불합격시켰다는 것을 명쾌하게 공개할 수 있다면 모든 의혹을 불식하고, 학교에 올바른 신호를 보낼 수도 있을 것이다.

민송기<능인고 교사 chamtc@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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