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일 대구 달서구의 한 볼링장. 주부 김지은(38) 씨가 연거푸 핀을 쓰러뜨리자 주위의 시선이 쏠렸다. 그의 손을 떠난 볼은 어김없이 삼각형으로 나열한 핀의 틈바구니를 파고들어 10개의 핀을 우습게 넘어뜨렸다. 볼이 핀에 닿자 핀과 핀이 부딪치며 내는 경쾌한 소리가 시원한 바람처럼 볼링장 구석구석을 파고들었다. "스트라이크." 지켜보는 사람들의 환호와 박수가 쏟아졌다.
하지만, 김 씨는 이런 기쁨을 만끽하지 못했다. 어릴 때 고열로 청력을 잃었기 때문이다. 그는 지난달 4일 막을 내린 2013 소피아 농아인 올림픽대회 볼링에서 역경을 딛고 금메달 3개를 목에 걸어 주목받았다.
◆농아인 볼링 여제
김 씨는 소피아 농아인 올림픽 볼링 여자 2인조, 단체전, 마스터스에서 금메달을 따내 3관왕에 올랐다. 그의 활약 덕분에 한국은 금메달 19개, 은메달 11개, 동메달 12개로 역대 최다 메달을 획득하며 목표했던 종합 3위로 대회를 마쳤다.
소피아에서 돌아오자마자 그는 30일부터 대구에서 열리는 전국장애인체육대회 준비에 열중하고 있다. 이번 체전에서 그는 개인전과 2인조에 출전해 2관왕을 노리고 있다.
그는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땄다고 안방에서 치르는 전국체전을 대충 할 수 없다"며 각오를 다지고 있다. 그의 열정과 승부욕은 장애를 극복하고 세계 정상에 서게 한 원동력이었다.
처음 출전한 2008년 전국장애인체전서 개인전과 2인조에서 우승, 2관왕을 차지하며 기량을 뽐냈던 그는 2009년 대만 농아인 올림픽 국가대표 2차 선발전에서 탈락의 고배를 마셨다. 조금 실력이 모자랐지만 자만심이 그의 발목을 잡았다.
이후 그는 매사에 온정성을 기울였고, 지난해 아시아태평양 농아인 기능대회에서 5개의 금메달을 거머쥐는 등 각종 대회서 좋은 성적을 냈다. 그는 대구를 넘어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청각장애인 여자 볼러에 이름을 올리고 있다.
◆볼링은 세상을 열어준 창
그는 태어난 지 15개월 만에 임파선염증으로 인한 고열로 청력을 잃었다. 어릴 때부터 세상의 소리를 들을 수 없었지만, 장애를 원망하기보다 사회의 한 구성원이 되려고 모든 일에 최선을 다했다. 그중 운동은 그녀를 세상으로 나서게 하는 큰 문이었다. 대구영화학교 재학시절, 탁구로 세상과 소통에 나선 그는 9년 전인 2004년 지인의 소개로 볼링을 시작했다.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중학 1학년까지 탁구선수로 활동한 그는 스포츠가 주는 재미를 알고 있었다. 그런 그에게 영남신학대 시절, 친구들과 들러본 볼링장은 신기했다. 핀을 제대로 맞히지 못했으나 신나는 경험이었다.
2005년 무작정 도전한 농아인 전국체육대회는 그의 승부욕을 불태웠다. 형편없는 점수를 받아든 그는 그때부터 볼링에 열중했고, 스스로 재능을 발견했다.
그러나 소리를 듣지 못하는 그가 좀 더 전문적인 스포츠 활동을 하는 데는 많은 불편이 따랐다. 들을 수 없으니 뭘 하나 배우려면 직접 현장을 찾아야 했다. 의사소통도 큰 장벽이었다. 정보습득이 어려웠고, 전문코치가 없어 기술향상은 스스로 알아서 해야 했다.
하지만, 발품을 팔며 대화가 어려울 땐 종이에 적어가며 이야기를 나눴다.
청각장애인 볼링모임인 '한빛'에서 활동하다 요즘은 '모던클럽'에서 일반인들과 어울리고 있다. 그의 화려한 성공에 클럽 회원 일부는 그와 소통하려고 수화를 배우고 있다.
그는 장애에도 스스로 움츠리지 않는다. 소피아 올림픽 때 여러 나라 선수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국제 감각을 키웠다.
김 씨는 "수화가 나라마다 조금씩 다르지만, 많은 것을 물어봤다. 몇몇 국가에서는 비장애인 코치가 상주해 전문적인 기술을 가르쳐 준다고 해 부러웠다. 우리는 올림픽 준비 및 대회 기간에만 전문코치가 배치됐다"고 했다.
2000년 같은 청각장애인 남편 오영석 씨와 결혼해 2명의 아이를 둔 김 씨. 오 씨 역시 '참빛'에서 볼링을 취미로 하고 있는데, 이번 전국장애인체전에서 그는 역도 종목에 출전한다.
김 씨는 "장애인들에게 스포츠 활동은 세상과 소통하는 가장 자연스러운 창구다. 볼링은 장애인이 혼자서도 할 수 있는 종목이다. 앞으로 많은 후배에게 어렵게 익힌 볼링을 가르쳐 주고 싶다"고 포부를 밝혔다.
최두성기자 dschoi@msnet.co.kr
수화통역=김우선(대구수화통역센터지역지원본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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