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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상학의 시와 함께] 토막말-정양(1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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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바닷가에

누가 써 놓고 간 말

썰물 진 모래밭에 한 줄로 쓴 말

글자가 모두 대문짝만해서

하늘에서 읽기가 더 수월할 것 같다

 

정순아보고자퍼서죽껏다씨펄

 

씨펄 근처에 도장 찍힌 발자국이 어지럽다

하늘더러 읽어달라고 이렇게 크게 썼는가

무슨 막말이 이렇게 대책도 없이 아름다운가

손등에 얼음 조각을 녹이며 견디던

시리디시린 통증이 문득 몸에 감긴다

 

둘러보아도 아무도 없는 가을 바다

저만치서 무식한 밀물이 번득이며 온다

바다는 춥고 토막말이 몸에 저리다

얼음 조각처럼 사라질 토막말을

저녁놀이 진저리치며 새겨 읽는다

-시집 『살아있는 것들의 무게』(창비, 1997)

마음을 쓰는 사람은 산을 좋아하고(仁者樂山), 머리를 쓰는 사람은 바다를 좋아한다(知者樂水)고 했던가. 고전에 나오는 이 말을 정면으로 '반박'한 사람이 있다. 거문도 사는 소설가 한창훈. 그에 따르면, 한을 품고 복수를 꿈꾸는 사람은 산으로 들어가고, 상처를 내려놓고 잊으려는 사람은 바다를 찾는다고 한다. 오래 산천을 주유하며 사람살이를 들여다보니 그렇더라는 것이다.

아닌 게 아니라 드라마를 보면 대체로 산으로 들어간 사람은 무술을 연마하며 이를 갈고, 바다로 간 사람은 낙조를 바라보며 낚시를 드리우고 있다. 일종의 전형이랄까. 이 시의 주인공도 바다를 찾은 걸 보면 다 내려놓고 싶었던 모양이다. 마지막 그리움까지 처절하게 토해낸 걸 보면.

토막말도 토막말이지만, 막말도 이렇게 시에 얹어 놓으니 보기 좋은 고명이 된다. 사실, 누가 이 말 앞에서 대놓고 웃을 수 있겠는가. 그저 가슴에 시린 얼음 조각을 같이 올려보는 수밖에.

시인 artandong@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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