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3년 시작된 대구의학강습소와 이후 1933년 시작된 대구의학전문학교는 한강 이남에서 유일한 의학교육기관이었다. 해방을 맞기 전까지 적잖은 의료인들이 이곳을 통해 배출됐고, 지역뿐 아니라 우리나라 의료계의 한 획을 그은 인물들이 대거 배출됐다. 일본인뿐 아니라 전국 각지에서 몰려든 조선인들이 서로 치열한 경쟁 속에 의학도의 길을 걸었다.
아래 글은 경북대병원 김용선 교수(영상의학과)가 근대건축사를 전공한 김주야 박사와 함께 1945년 대구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한 한 일본인을 인터뷰한 내용이다.
◆졸업 후 약 70년 만에 만난 일본인 선배
2013년 8월 마지막 주 김주야 박사로부터 전화가 왔다. 이상한 논문을 찾았으니 와 보라는 것이었다. 1945년 대구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한 한 일본인의 인터뷰에 관한 것이었는데, 내용이 흥미로웠다. 당시 대구에 살던 일본인이었다는데 관심이 갔다. 편견이 없는 순전한 학교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고 생각됐기 때문이다.
학적부를 찾아보니 3학년 성적이 22등이었다. 경비를 아껴야 한다는 김 박사의 성화에 못 이겨 오전 4시에 김포공항에 가서 도쿄 하네다공항을 거쳐 시마네현 이즈모 공항에 도착해 마츠에시로 향했다. 오후 4시 반에 도착했다.
92세의 사카키바라 아사오 씨는 말이 통하지 않았는데도, 그냥 마음씨 좋은 선배처럼 여겨졌다. 짧은 시간의 어색함을 지나 애연가인 그의 자욱한 담배 연기 속에서 이야기를 시작했다. 특유의 시크한 유머와 위트를 갖고 있었다.
담배를 피우느냐고 물었고, 주저하며 조금 피운다고 답하자 담배와 라이터를 건네주며 "피워!"라고 했다. "우리나라 예절로는 어른 앞에서는…"이라고 조심스러워하자 말을 끊으며 "일본이잖나, 관계없어"라고 했다.
김용선=아, 예. 학교 90주년 기념식을 합니다. 1923년 요시다 쥰이치로 선생이 설립하고, 그것을….
사카키바라=(말을 끊으며) 그런 걸 다들 알고는 있지. 그런데 난 잘 몰라.
김=야마네 교장 선생은 어떤 분이었습니까?
사=(그런 걸 왜 자기에게 묻느냐는 표정으로) 학생이 교장과 무슨 대화를 할 수 있겠어? 몰라!
◆무더기 낙제, 힘든 공부
김=한국 학생들과는 잘 지내셨나요?
사=조선 학생들? 아주 우수했지. 특히 공부를 잘했어. 뭐 그렇게 지내는 거지. 공부하는 데 너무 힘들어서 그런 신경 쓸 여유가 없었어. 몰라. 자기들끼리는 조선말로 대화하니까 욕을 했어도 나는 모르지.
김=일본 학생들은 어떠했습니까?(당시 정원 70명 중에 일본 학생은 60명, 조선 학생은 10명(대구 출신은 4명)이었다)
사=무더기로 낙제했지. 전부 일본 의대에서 떨어져서 조선에 온 사람들이었으까. 그나마 조선 출신 일본 학생들은 괜찮았지만 본토에서 온 학생들은 엉망이었지.
김=기억에 남는 교수님은?
사=해부학, 소아과 교수!(우리가 졸업앨범의 사진을 보여주자) 아!(기억이 안 좋은 모양이었다) 무더기로 낙제시켰지. 학년말이 되면 겨울이라 저녁은 춥고 어두운데, 4층 회의실에서 하고 있는 교수회의 결과를 기다렸어. 회의 결과는 명부 이름 앞에 '진'(進), '낙'(落)이라고 써서 벽에 게시했어. 인권유린이지.
대구의학전문학교와 함께 같은 시기에 의학전문학교로 승격된 평양에 대해 묻자 그는 손사래를 치며 대수롭잖다는 듯이 말했다. 평양보다는 대구 학생들이 훨씬 우수했고, 비교할 가치조차 없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김=해부제를 학교 근처의 절(현재 관음사)에서 했다면서요?
사=몰라! 그런데 한국에서는 스시를 먹나?
◆오키섬에서 평생 섬사람 진료
먹는다는 대답에 배달시켜야겠다며 잠시 전화를 하러 나갔다. 그 사이 방을 둘러보는데 벽에 붙은 수많은 표창장, 감사장을 발견했다. 그 집은 2층 집이었고 건평이 무려 264㎡(80평)이었다. 혼자 살고 있었다. 그중 정부로부터 받은 훈장이 있었다.
김=저 훈장은 어떻게 받게 된 겁니까?
사=아, 주는데 안 받을 이유가 없어서.(항상 이런 식이다)
김=훈장의 이유가 있을 것 아닙니까?
사=한국에서 돌아온 직후 마츠에 병원에서 2년 반을 보내고 바로 오키섬으로 갔지. 섬 사람들을 위한 일반 진료로 평생을 보냈어. 전공도 없이 온갖 병을 다 치료한 셈이지. 한번은 애를 받는데, 태반이 나오지 않아서 팔꿈치까지 손을 넣어서 꺼낸 적도 있었어. 헬기로 이송하기도 하고, 75세에 섬을 떠날 때까지.
내게 나이를 묻더니 아들보다 한 살 적다고 했다. 아들도 소아과 의사라고 해서 어디에 있는지를 물었다.
사=오키섬. 원래는 동경의과대학을 나와서 종합병원에 근무하고 있었지. 그런데, 내가 은퇴해야 하니까 네가 섬으로 들어가라고 했어.
김=순순히 가던가요?
사=어쩌겠어?
◆다시 가보고픈 대구
훈장의 기록에는 이력서가 있었는데, 첫줄에 '대구의학전문학교 졸업'이라고 명시돼 있었다. 스시가 배달됐고, 직접 차를 우려 주는 손놀림이 민첩했다. 먹는 속도가 빠른 내게 연신 자기 것을 덜어주는데, 언어의 불통을 넘어선 후배 사랑인가 싶었다. 보통의 처음 만난 방문객을 대하는 일본의 식사예절로는 상상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대구에 대한 기억을 묻자 "가을에 하늘이 파랗고 높았어"라며 "가보고 싶다"고 했다. 그는 1922년 울릉도에서 태어났고, 1945년 10월 일본으로 간 뒤 한 번도 한국에 오지 못했다. 한국은 물론이고 일본을 떠나본 적도 없어서 여권을 만들지도 않았다. 90주년 기념식을 해서 초청할 테니 한번 오시라고 했다.
사=내가 평소에는 내의 차림으로 사는데 네가 온다고 해서 오랜만에 셔츠 한 장 입어봤다. 자세도 안 좋고, 옷도 차려입어야 하고. 못 가겠다. 그런데 가보고 싶기는 하다. 대구는 몹시 추웠어. 해부학 실습시험을 치는데, 시험공부가 너무 힘든 거야. 추워서. 그래서 어떤 친구들은 실습 사체 팔 하나를 천에 싸서 따뜻한 집에 가서 공부하고, 새벽에 갖다놓는 걸 반복했지.
◆국적을 떠난 선후배 간의 정
밤은 깊어가고 담배연기는 짙어가는데 선배의 표정에는 피로함과 생기가 동시에 보였다. 그의 심정도 그랬으리라.
김=이제 떠나야겠습니다.
마=더 있다 가!(차를 또 주면서) 술 줄까? 갖고 가. 학장님 드려라. 한 병은 네가 마시고.(부엌 옆 창고에서 일본 술 2병을 꺼내주었다) 위스키도 있는데 줄까?
고맙지만 무거워서 들고 갈 수 없다며 사양하자 못내 아쉬운 표정이었다. "내일 마츠에에서 가장 비싼 집에 가서 점심 사줄까?"라는 물음에 비행기 시간 때문에 다시 사양할 수밖에 없었다. "올해 다시 올 거지?"라고 아쉬움이 잔뜩 묻어나는 말투로 물었고, 말끝을 흐리며 "예…"라고 답할 수밖에 없었다. 집을 나서는데 현관에 계속 서 있었고, 문이 닫힐 때까지 시선을 돌리지 않고 있었다. 알 수 없는 쓸쓸함을 안고 숙소로 돌아갔다.
김수용기자 ksy@msnet.co.kr
감수=의료사특별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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