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술에 취하는 건 No! "분위기에 취해봐"…힐링시대 음주도 힐링스타일

30∼40대 직장인들 '신주류' 술문화

30∼40대 직장인을 비롯한 젊은이들이
30∼40대 직장인을 비롯한 젊은이들이 '신주류' 술집에서 술과 음악을 가볍게 즐기고 있다.

'술. 이제 마시지 말고 즐기세요.'

술을 마시는 것이 아니라 즐기는 '신주류'족이 등장했다. 힐링 열풍을 타고 가볍게 즐기며 마음을 치유하려는 음주문화가 확산되고 있어서다. 이들은 스타일로 술을 즐긴다. 또 직접 나만의 술을 제조해 마시기도 한다. 이러한 변화를 리드하는 그룹은 30, 40대 직장인 남성들. 이전 세대에 비해 외국문화에 밝고 문화를 향유하고자 하는 욕구가 강한 이들은 술 마시는 스타일이나 종류에 있어 변화를 보이고 있다.

술 마시는 장소도 달라졌다. 예전엔 1차 음식점에서 반주, 2, 3차로 차수 변경하면서 술자리를 이어가는 것이 보통이었는데 요즘은 와인바나 라운지 바 등 개성 있는 술자리를 찾는다. 라운지 바에서 칵테일 한 잔을 들고 몸을 흔들면서 나만의 여유를 즐기는 아저씨들을 보는 것은 이제 낯설지 않다. 술을 단순히 마시는 게 아니라 즐기자는 분위기이다.

◆술 마신다? 아니 즐기자

12일 오후 8시 대구 수성구 두산동의 'fifth 라운지'. 안으로 들어서자 DJ가 만들어내는 비트 있는 음악이 실내 가득 울려 퍼진다. 음악에 젖어 몸을 들썩이는 사람, 흥겹게 담소를 나누는 사람. 각양각색이다. 인테리어도 특이하다. 중세시대 성당 같은 구조에 테이블도 넓고 통로 역시 큼직큼직하다. 그런데 하나같이 마시는 술들이 칵테일 아니면 보드카다.

지난해 12월 오픈한 이곳은 달라진 30, 40대의 음주문화를 단적으로 볼 수 있는 곳이다. 가볍게 술 한잔할 수 있는 바에 댄스, 노래, 레포츠 등을 위한 공간이 갖춰져 있다. 유흥주점보다는 덜 부담스럽고 일반주점보다 은밀(?)하거나 독립된 공간 연출이 가능하다. 비즈니스나 담소를 위한 공간과 술 마시고 파티를 즐길 수 있는 공간으로 나뉘어 있다. 또 별도로 마련된 흡연실에도 조명을 배치, 춤추면서 담배를 피울 수 있다. 'fifth 라운지' 양근석 대표는 "음식을 배 채우기 위한 수단이 아닌 문화로 바라보듯 이제 술자리도 특유의 문화가 되고 있다. 개인적인 취향을 고려하면서도 가격은 저렴한 새로운 형식의 바. 즉 라운지 형식의 바를 만들고 싶었다"고 했다.

'fifth'가 좋은 반응을 보이자 대구에서도 비슷한 형태의 바가 잇따라 문을 열고 있다. 수성구를 비롯해 경북대 등 대학가를 중심으로 하나 둘 생겨나고 있다. 동성로에 주로 몰려 있는 대부분의 바와 달리 차별화된 인테리어와 맞춤형 서비스를 제공한다.

'fifth' 인근의 '헤븐' 역시 40대 이상을 겨냥한 음악카페 형식의 바. 이곳은 4천여 장의 LP 음반을 갖추고 있어 다양한 음악을 제공한다. 신청곡을 받고 이를 들려주는 옛날 음악다방 형식을 취하고 있다. 이곳 현종문 사장은 "인근 주민들은 물론 서울 등 외지에서도 입소문을 듣고 찾아오는 손님들이 많다. 특히 혼자 오는 사람들을 위해 다양한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고 했다.

30, 40대를 위한 라운지 바에 20대들도 몰리고 있다. 경북대 북문 인근에 있는 어반플로어 라운지 바. 지난 3월 문을 연후 30, 40대 손님은 물론 최근에는 외국인과 20대 손님들의 발길도 이어지고 있다. 왁자지껄한 분위기의 술자리보다는 스타일리시한 분위기의 가게에서 조용하고 가볍게 한잔 즐기고자 하는 젊은이들이 늘어서다. 최재광 사장은 "진탕 술을 마시는 대학가 음주문화도 바뀌기 시작했다. 요즘 세대들은 술을 많이 마시기보다 음악과 함께 적당히 즐기는 것을 좋아한다"며 "학창시절부터 '안주빨'을 싫어했다. 술을 많이 마시고 안주를 많이 먹는 것보다 술을 진정으로 즐길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고 싶었다"고 했다. 단순한 바가 아닌 그 이상의 새로운 문화공간을 제공한다는 설명이다.

◆나만의 술

음주 습관이 변화되면서 인기 주종 순위도 변했다. 폭탄주, 알코올 함량이 높은 위스키는 갈수록 외면받는 대신 토종 저도 위스키, 보드카 등이 새롭게 각광받고 있다. 두산동의 라운지 바에서 바텐더로 일하고 있는 이중섭 씨는 "술을 그 자체로 받아들이기보다 마시는 과정을 중요시하는 질적인 음주 패턴이 나타나고 있다. 위스키 등도 좋다 나쁘다 식의 이분법적인 사고로 평가하던 데서 벗어나 캐릭터별로 세분화되고 칵테일의 경우도 직접 제조해 마시는 시대가 됐다"고 했다.

라운지 바에서 가장 인기를 끌고 있는 주종은 '예거마이스터'. 주정에 과실과 감미료를 넣어 달콤하게 만든 이 술은 독주에 부담을 느끼는 사람이나 여성들이 많이 찾는다. 무색의 투명한 술. 보드카, 럼, 진, 데킬라 등도 인기다. 이 씨는 "최근 몇 년 사이 30, 40대를 중심으로 바나 파티에서 칵테일을 즐기는 이들이 늘면서 칵테일 베이스로 쓰이는 무색의 투명한 술들이 인기를 끌고 있다. 증류주에 과실, 약초 등 향미 성분을 가미해 별도의 맛을 가진 리큐르도 인기다"고 전했다. 전문가들은 "음주문화가 독주에서 순한 술로, 유흥주점에서 라운지 바 등으로, 집단적 음주에서 개별적 음주로 변하고 있다. 시간이 흐를수록 나 홀로 즐기는 새로운 음주문화가 확산될 것이다"고 전망했다.

한국의 음주문화를 상징하던 폭탄주는 인기 하향세다. 소주 혹은 양주를 맥주와 섞어 먹는 폭탄주는 독한 술을 평등하게 나눠 마시고 빨리 취할 수 있다는 게 가장 큰 장점이다. 수성구에서 바를 운영하는 이영미(35) 씨는 "최근 들어 위스키를 주문하는 사람이 거의 없고 보드카를 체이셔와 섞어 마시거나 외국 맥주를 즐기는 손님이 대부분이다"고 했다.

달라진 음주문화는 회식문화의 변화로 이어진다. 회사원 박영수(44) 씨는 "회사 회식 때 상징적으로 폭탄주를 한두 잔 마실 뿐이다. 회식자리도 라운지 바나 와인 바 같은 곳을 더 선호한다. 여성 동료가 많아지면서 술을 많이 마시는 회식자리가 줄고 주종도 와인, 칵테일 등으로 다양화하는 추세다"고 했다. 그렇다고 아쉬움이 없는 것은 아니다. "예전보다 술자리가 깔끔하고 건강에도 이로우니까 좋지요. 그러나 술자리는 원래 하나 되기 위해 만드는 자리잖아요. 서로 허물어지거나 솔직한 모습을 볼 수 없으니 좀 허전하던데요." 직장인 이정수(50) 씨의 말이다.

최창희기자 cchee@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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