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야고부] 여유(與猶)'지지(止止)

'호'(號)의 시작은 중국 당대(唐代)다. 송대에 이르러 널리 보편화됐고 우리는 삼국시대부터 호가 쓰였다고 한다. 호는 당호'아호'별호라고도 하는데 호를 짓는 기준에 대해 이규보의 '백운거사어록'에 '거처하는 바를 따라 호로 한 사람(所處以號)도 있고, 자신이 아끼는 것을 근거(所蓄以號)로 하거나, 이룬 뜻이나 이루려는 뜻(所志以號)을 호로 한 사람도 있다'고 했다. 소우이호(所遇以號) 즉 처한 환경이나 여건도 호를 삼는 기준이 됐다.

조선 후기에 나온 '당호비고만성씨보'(堂號備攷萬姓氏譜)는 당호를 모은 책이다. 고려 말에서 조선 말까지 당호를 가진 인물을 성씨별로 분류해 수록한 책으로 총 185개 관성에 3천800명이 수록돼 있다. 이로 볼 때 웬만한 가문의 선비는 대개 당호를 지녔음을 알 수 있다. 역사상 가장 많은 호를 가진 인물은 추사다. 그는 무려 503개의 호를 썼다.

다산 정약용은 '여유'(與猶)라는 당호로 널리 알려져 있다. 도덕경의 '여(與)함이여, 겨울 냇물을 건너듯이, 유(猶)함이여, 너의 이웃을 두려워하듯이'에서 나온 말이다. 항상 조심하며 살자는 뜻인데 18년의 긴 유배 생활 동안 괜한 의심을 사지 않고 진중히 처신할 수밖에 없던 처지를 생각하면 의미가 가슴에 와 닿는다. 사임당(師任堂)은 주나라 문왕의 모친인 태임(太任)을 본받는다는 뜻이고, 이규보의 지지헌(止止軒)은 능히 멈춰야 할 곳을 알아 멈추는 것을 뜻하는데 '그칠 곳에 그치니 속이 밝아 허물이 없다'는 주역의 괘사에서 따왔다.

저축은행 금품 수수 혐의로 기소된 박지원 의원이 1심 재판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다. 선고 직후 그는 "검찰이 표적수사로 죽이려고 했지만 살아남았다. 크리스마스 선물"이라는 소회를 남겼다. 11년 검찰과의 질긴 악연을 이제 끊고 싶다고도 했다. 악연이라고 표현했지만 각종 비리에 끊이지 않고 연루됐다면 죄의 유무를 떠나 누구의 허물인지 곰곰이 생각해봐야 한다.

뒷돈 받고 금괴 밀수를 돕다가 구속된 인천세관장이나 신도청 예정지의 택지 분양 대상자 명단을 빼줬다 적발된 공기업 간부의 소식은 혀를 차게 한다. 이집트의 현자 프타호텝은 '심장을 따르면 행복하고 뱃속을 따르면 불행하다'고 했다. 탐욕과 속됨은 불행의 다른 이름이다. 옛 사람들이 스스로 당호를 지어 경계로 삼은 뜻을 한번 헤아려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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