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이 법으로만 돌아가는 것은 아니다. 질서있는 사회를 위해 서로 지켜야 할 약속, 넘지 말아야 할 선이 있다. 법으로 처벌할 수 없지만 남에게 피해를 주거나, 한 대 때려주고 싶을 정도로 얄밉게 행동하는 사람들을 우리는 '얌체'라고 부른다. 집에 있는 쓰레기를 몽땅 가져와 대형마트 쓰레기통에 갔다 버리거나, 지하철이 도착하자마자 사방에서 전투적으로 끼어드는 승객들은 그나마 귀여운(?) 얌체에 속한다. 하지만 타인을 고통스럽게 만드는 '만성 얌체'들도 있다. 우리 주변 곳곳에 숨어 있는 얌체들은 어떤 모습일까?
◆끼어들고, 앞길 막는 지하철 얌체들
대구가 고향인 직장인 박혜민 (29'여'성남시 수정구 신흥동) 씨는 대구에서 지하철을 탈 때마다 작은 '문화 충격'을 느낀다. 대구 지하철은 서울에 비해 비교적 한산한 편인데 사람들이 내리기도 전에 플랫폼에 선 승객들이 어깨를 밀치며 안으로 질주하기 때문. 지하철 도착 직전에 질서정연했던 줄이 한순간 무의미해진다. 박 씨는 "내가 제일 앞줄에 서 있는데 자연스레 내 앞에 와서 서는 사람도 있다. 지하철이 도착하면 열차 안에 있던 승객이 내리고 있는데 아랑곳하지 않고 안으로 마구 밀려든다"며 "끝까지 플랫폼에 서 있다가 사람들이 다 내리고 제일 마지막에 타면 나만 바보가 된 기분"이라고 했다.
지난주 평일 오후 1시, 출퇴근대가 아닌 한가한 시간에 1'2호선 환승역인 반월당에서 시민들의 지하철 탑승 행태를 관찰했다. 지하철이 혼잡해 끼어든다는 변명이 통하지 않는 시간대다. 관찰 결과, 얌체족은 크게 두 분류로 나눠졌다. 첫 번째, '줄 무시형'이다. 지하철 도착 직전까지 플랫폼 의자에 앉아 있다가 '띠리링~띠리링~' 지하철 도착 음이 들리면 자연스레 줄 맨 앞에 끼어든 뒤 내리는 승객보다 먼저 탑승하는 식이다. 20, 30대 젊은 층보다 60세 이상 어르신들이 이 같은 행동을 하는 경우가 많았다.
두 번째 얌체족은 '길 막기 형'이다. 지하철 이용객이 많은 반월당역에는 바닥에 초록색과 빨간색 선이 있다. 초록색은 승객이 기다리는 줄, 빨간색은 내리는 줄이라는 뜻이지만 이 줄은 철저하게 무시됐다. 빨간 줄 가운데 떡하니 서서 내리는 승객들의 갈 길을 막는 이들도 있었다. 한 50대 여성이 양손 가득 짐을 들고 가운데 서 있자 내리는 이와 타는 이가 뒤엉키는 혼잡이 발생했다. 질서를 지키는 시민들을 이 같은 행동을 볼 때마다 씁쓸해진다. 이날 반월당역에서 만난 대학생 신명은(23'여) 씨는 "지하철에서 내리지도 않았는데 갑자기 사람들이 밀려와서 못 내릴 뻔 한 적도 종종 있다. 남들이 다 그렇게 한다고 해서 나도 똑같이 행동할 수 없으니 짜증이 나도 참고 기다린다"고 말했다.
반월당역에서 근무하는 권병문 주임은 "7, 8분만 기다리면 다음 열차가 오는데 스크린도어가 닫히기 직전에 달려가서 손이나 발을 넣어 억지로 여는 승객들도 있다. 스크린도어에 센서가 있어 보통 자동으로 열리지만 센서가 움직임을 감지하지 못해서 그냥 닫히면 굉장히 위험하고, 열차 출발이 늦어져 다른 승객에게 피해를 준다"며 "얼마 전 한 중년 남성이 자신이 스크린도어에 손을 넣어 다친 뒤 '보상하라'며 소리를 지르고 항의한 적도 있다"고 털어놨다.
◆'내 생각'만 하는 교통 얌체들
운전자들은 대중교통을 이용할 때 알지 못했던 다양한 종류의 얌체들을 목격한다. 직장인 이모(28'여'대구 중구 삼덕동) 씨는 주차 때문에 화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예전에 살던 집에서 이사한 것도 주차 분쟁 때문이었는데 새 원룸 건물로 이사한 지 한 달도 안 돼 또 주차 때문에 분통을 터뜨렸다. 월요일 아침 출근길, 정체불명의 차가 이 씨의 차 앞에 사이드 브레이크를 풀어두지 않고 이중 주차를 해놓았다. 까맣게 썬팅이 된 차 안에 전화번호는 없었다. 이 씨는 "이중 주차를 할 때 전화번호를 적어두는 것은 기본 매너"라며 "월요일 아침부터 화내기 싫어서 '전화번호를 적어놓든지, 사이드 브레이크를 풀든지 하라'는 소심한 경고장만 차 앞유리에 끼워두고 택시를 타고 출근했다"고 비판했다.
파란불 신호가 들어오자마자 좌회전 차로로 불쑥 끼어들어 줄지어 늘어선 차들을 한순간 바보로 만드는 운전자들도 얄미운 '얌체족'에 속한다. 중구 동신교네거리 신천대로 방향 좌회전 차선은 끼어들기가 빈번하게 일어난다. 좌회전 신호를 한 번 놓치면 중구청까지 가서 유턴을 해야 하기 때문에 무리하게 끼어드는 차량이 많다. 대구 중부경찰서 교통조사계 박병호 경사는 "출퇴근 시간에는 신호가 두 세 번 바껴야 좌회전을 할 수 있으니 마음 급한 운전자들이 끼어들기를 많이 한다. 경찰이 단속하고 있는 데도 혼잡한 시간에는 차를 세워 딱지를 끊기 힘들다는 점을 알고 끼어드는 운전자들도 있다"고 말했다.
◆얌체가 발전하면 '블랙 컨슈머'
대형마트에는 쇼핑용 바구니를 자기 것인 것 마냥 훔쳐가는 이들도 있다. 북구의 한 대형마트는 수시로 사라지는 바구니 때문에 골머리를 앓는다. 대형 카트를 가져가는 고객은 드물지만 소형 바구니가 사라지는 경우는 비일비재하다. 이곳 대형마트 관계자는 "매달 바구니 개수를 세보면 셀 수 없이 많이 사라져 수시로 본사에 바구니를 주문한다. 고객이 쇼핑한 뒤 매장 밖으로 바구니를 가지고 나가더라도 밖에 두고 가는 사람들도 있으니 제재할 수 없다"면서 "또 인근 아파트에 사는 사람들이 카트를 끌고 간 뒤 제자리에 두지 않아 매일 아침 아파트에 주차 요원이 가서 카트를 수거해온다"고 말했다.
요즘에는 얌체 소비자를 칭하는 전문 용어도 있다. 악성 민원을 제기하는 소비자를 뜻하는 '블랙 컨슈머'(Black Consumer)다. 대구의 한 백화점에서 영업 관리를 하는 서모(29'여) 씨는 블랙 컨슈머의 악성 민원을 해결하는 것이 주요 업무 중 하나다. 구매 금액별로 증정하는 사은품만 받은 뒤 나중에 환불하거나, 멸치 한 박스를 산 뒤 한 줌만 남겨놓고 "맛이 없다"며 환불을 요구하는 소비자들은 애교 있는 얌체에 속한다. 서 씨는 "상품 텍이 옷핀으로 돼 있어서 탈부착이 가능한 옷을 사 친구 결혼식 가서 입고 난 뒤 환불하는 고객도 있다. 옷을 살펴보면 안 감이나 팔꿈치 부분 다 구겨져 있고 향수 냄새까지 나는데도 '안 입었다'며 직원을 괴롭히고 계속 우기면 우리도 이길 재간이 없다"면서 "이런 옷은 다시 팔 수도 없으니 반품 처리해야 한다"고 한숨지었다.
무조건 목소리를 높여 싸우면 이긴다는 식으로 밀어붙이는 악성 고객도 있다. 서 씨는 "겨울에 가방 사놓고 '여름에 매보니 덥다'고 환불을 요구하거나, 매장에서 옷을 사서 그날 입고 가는 것을 직원들이 봤는데도 다음 날 '바꿔줘'라고 우기거나, 우리 매장에서 산 옷이 아닌데, 영수증과 카드도 없이 와서 '여기서 샀다'며 우기는 경우도 있다. 말도 안 되는 이유로 환불을 요구하는 개그 콘서트 '정 여사'는 가상의 인물이 아니다"고 꼬집었다.
황수영기자 swimming@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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