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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서각의 시와 함께] 영진설비 돈 갖다 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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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철(1960~ )

막힌 하수도 뚫은 노임 4만 원을 들고

영진설비 다녀오라는 아내의 심부름으로

두 번이나 길을 나섰다

자전거를 타고 삼거리를 지나는데 굵은 비가 내려

럭키슈퍼 앞에 섰다가 후두둑 비를 피하다가

그대로 앉아 병맥주를 마셨다

멀리 쑥국 쑥국 쑥국새처럼 비는 그치지 않고

나는 벌컥벌컥 술을 마셨다

다시 한번 자전거를 타고 영진설비에 가다가

화원 앞을 지나다가 문 밖 동그마니 홀로 섰는

자스민 한 그루를 샀다

내 마음에 심은 향기 나는 나무 한 그루

마침내 영진설비 아저씨가 찾아오고

거친 몇 마디가 아내 앞에 쏟아지고

아내는 돌아서 나를 바라보았다

그냥 나는 웃었고 아내의 손을 잡고 섰는

아이의 고운 눈썹을 보았다

어느 한쪽,

아직 뚫지 못한 그 무엇이 있기에

오늘도 숲속 깊은 곳에서 쑥국새는 울고 비는 내리고

홀로 향기 잃은 나무 한 그루 문 밖에 섰나

아내는 설거지를 하고 아이는 숙제를 하고

내겐 아직 멀고 먼

영진설비 돈 갖다 주기

  -시집 『영진설비 돈 갖다주기』, 문학동네, 2001

아내의 심부름으로 영진설비에 돈을 갖다 주는 것이 화자의 일이다. 매우 간단한 일이다. 그런데 가다가 비가 와서 술을 마시고 자스민을 사기도 하면서 결국 돈 갖다 주는 일에 실패한다. 그래서 화자는 영진설비에 돈 갖다 주는 길이 멀고 멀다고 말한다. 이 시가 우리의 마음을 흔드는 것은 화자에게는 있고 우리 현대인에게는 없는 것 때문일 것이다. 그건 여린 감성, 낭만 같은 것이 아닐까?

시인 kweon51@cho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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