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세 거인 에게 길을 묻다] 제3부 김수환 추기경 3)사랑과 섬김의 리더십

"이웃사랑이 곧 하느님 사랑…옹기와 같이 모든 것 포용할 수 있어야"

김수환 추기경이 1981년 5월 마더 데레사 수녀가 방한했을 때 안내하고 있다. (사진: 김수환 추기경 생질 정영웅씨 제공)
김수환 추기경이 1981년 5월 마더 데레사 수녀가 방한했을 때 안내하고 있다. (사진: 김수환 추기경 생질 정영웅씨 제공)
1979년 4월 20일 김수환 추기경은 영등포 교도소 미사강론에서
1979년 4월 20일 김수환 추기경은 영등포 교도소 미사강론에서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이 모두 진실한 인간, 정의의 인간, 사랑의 인간이 되어야 세상이 진리와 정의와 사랑으로 가득하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묵은 내가 죽고, 새로운 나, 그리스도를 닮은 새 인간이 내 안에서 나고, 자라고, 성숙해지는 것입니다"고 말했다.

김수환 추기경의 리더십과 사회'정치'경제 일반의 지도자들이 갖고 있는 리더십의 핵심적인 차이는 '영적 리더십'이라고 할 수 있다. 과학의 발달과 경제발전으로 물질적인 풍요를 누리고 있는 현대사회에 이르러 기존의 '성장'과 '승리'를 위한 리더십만으로는 새롭게 야기되는 문제를 해결하는 데 한계가 있다.

김수환 추기경은 하느님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일치시키려는 삶을 살았다. 김 추기경의 영성은 사목표어인 '너희와 모든 이를 위하여'와 '옹기'로 나타난다. 사목표어는 종교적 이상을 나타내며, '옹기'는 김 추기경의 투신과 순종, 비움, 가난, 겸손을 일컫는 신앙의 삶을 상징한다. '옹기'는 김수환 추기경의 호(號)이자 가톨릭이 박해받던 시절 산속에서 옹기를 구워 생계를 잇고 복음을 전파한 수단이자 좋은 것과 나쁜 것, 심지어 오물까지 담을 수 있는 그릇을 의미한다.

성장과 이익을 최대의 가치로 삼는 기업경영에서도 근래에는 '사랑과 섬김'으로 조직의 경쟁력을 배가시킬 수 있다는 이론도 있다. 미국의 경영학자 로버트 그린리프는 이것을 '서번트 리더십'(Servant Leadership) 즉 '섬김의 리더십'이라고 명명했다.

▷가장 낮은 자리로

김수환 추기경은 명령과 획일적인 지휘체계를 통해 조직과 사회를 이끄는 것이 아니라 사랑과 헌신으로 사회를 뭉치게 했다. 추기경의 이런 활동은 그리스도의 모습과 성경 말씀에 바탕을 두고 있다.

예수님은 열두 제자를 불러 이렇게 당부했다.

'너희도 알다시피 다른 민족들의 통치자들은 백성 위에 군림하고, 고관들은 백성에게 세도를 부린다. 그러나 너희는 그래서는 안 된다. 너희 가운데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또한 너희 가운데 첫째가 되려는 이는 종이 되어야 한다.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이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마태 20, 25~28)

1970년대, 80년대 한국사회에 닥친 문제는 당시까지와 다른 역량을 요구했다. 무엇보다 상황에 맞게 유연하게 판단하는 능력이 필요했다. 김수환 추기경은 때로는 사랑과 섬김으로, 때로는 예수님처럼 절대적인 권위를 갖고 대응했다.

한국 현대사에서 어려움에 직면할 때마다 정치인들은 김수환 추기경을 찾아왔다. 대통령 후보, 야당 대표를 비롯해 유명한 정치인들이 대부분 그랬다. 추기경은 그들에게 '빛과 소금'을 전했다. 위정자들에게 올바른 민족사의 방향을 설정해주었고, 인간이 존엄성과 인간성 회복의 신념을 심어주었다. 길을 잃고 방황하는 지식인들에게는 바른 이정표를 제시하며 행동으로 이끌어주었다. 때로는 엄하게 꾸짖기도 했고, 따뜻한 말로 위로도 했다. 그런가 하면 가난하고 소외받는 이들에게는 추기경이 스스로 가까이 다가가 위로와 힘을 주었다.

▷젊은이에게 배우다

미국 가수 마이클 잭슨이 방한했을 때 추기경은 그를 만나기로 결정했다. 그때 신자들로부터 '왜 그런 사람을 만나느냐'는 항의가 잇따랐다. 당시 추기경은 "죄인, 창녀와 공공연히 어울리기 좋아하셨던 예수님을 따르는 내가 마이클 잭슨을 만나지 말아야 할 이유는 없습니다"고 답했다.

더 나아가 추기경은 "나는 사실 마이클 잭슨이 어떤 모습이 우리 청소년들을 잡아끄는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를 만나고 난 후 깨달았습니다. 제가 그에게 '많은 젊은 친구들이 당신이 음악을 좋아하는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묻자 마이클은 '저는 그들을 사랑하고, 그 사랑을 음악을 통해 표현해서 그럴 것입니다. 저는 공연을 할 때마다 하늘로부터 사랑의 영감을 느끼며 그 느낌을 그들에게 전하려고 노력합니다'라고 답했습니다. 나는 그가 했던 말 '저는 그들을 사랑합니다'는 말을 오랫동안 생각했습니다. 추기경인 내가 마이클 잭슨만큼 청소년을 사랑하고 있는가 하는 반성도 들었습니다. 그는 영혼이 맑은 사람이었습니다. 마이클 잭슨과 대화는 내게 더 사색하는 자극을 주었습니다"라고 말했다.

▷구별이나 차별 없는 사랑

김수환 추기경은 음지의 여성들에게 애정을 쏟았다. 수녀원에서 운영하는 '쉼터'를 방문해 그녀들과 거침없는 이야기를 나누며 그녀들을 축복하고, 위로했다. 추석날 쉼터를 방문한 추기경에게 한 여성이 "추기경님 담뱃불 좀 주세요" 라고 했다. 순간 분위기가 싸늘해질 수 있었지만 추기경은 "네, 여기 있습니다"라며 불을 전해주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추기경이 명절을 맞이해 허례로 한번쯤 찾아온 것으로 알았던 여성들은 허심탄회하게 자신들의 고충을 털어놓았다. 그날 추기경과 이 여성들은 함께 윷놀이를 하고, 과일도 먹으면서 신나는 하루를 보냈다고 한다.

이후 '쉼터'에 있던 한 여성이 병으로 세상을 떴다. 그녀를 찾아오는 사람은 거의 없었지만, 추기경은 그 여성을 찾아가 명복을 빌어주었다.

"주님께서 이 여성을 보살펴 주소서."

찾아오는 이가 드문 썰렁한 빈소를 찾아와 간절하게 명복을 비는 추기경의 모습에서 쉼터의 많은 여성들이 감화를 받았다. 이처럼 추기경의 사랑에는 차별이 없었다. 추기경에게는 모두가 자신이 돌보아야 할 양떼였다.

▷가난한 이들의 벗

김수환 추기경은 벗이 많았다. 대학생, 어린이, 가난한 사람, 나환우, 장애인, 사형수, 강제 철거로 거리로 나앉은 빈민들과 어울렸다. 농민과 노동자들을 찾아다니며 그들의 권익을 위해 애썼다. 그러나 추기경 본인은 늘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에게 더 가까이 다가가지 못한 것이 후회스럽다고 말했다.

추기경은 우리가 누리는 행복은 누군가의 고통과 불행이 전제된 것으로 보았다. 그는 "나는 특히 나환우를 비롯해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에게 빚진 게 많은 사람이다. 남들보다 그들에 대한 사랑을 더 많이 얘기했음에도 실상 그들을 더 많이 사랑하고, 더 자주 껴안아 주지 못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김수환 추기경은 노동자, 학생, 빈민, 사형수, 나환우, 에이즈환자 등의 어려움을 해결하고 인권을 확보하기 위해 앞장서서 문제를 해결하는 데 힘을 썼다. 그의 사랑은 인류에 대한 '보편적인 사랑'이었으며, 지역이나 인간의 경계를 뛰어넘는 것이었다.

▷사랑은 인류를 구원하는 힘

김수환 추기경은 우리 사회가 맞이하는 문제를 타개하기 위해서는 우리 모두 참된 인간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국 사회의 참된 발전을 위해서는 한국인 전부가 사랑이라는 기본적인 가치를 가져야 한다는 말이었다. 인간에 대한 사랑과 나라에 대한 사랑을 바탕으로 정직하고 성실하게 행할 때 나라를 가꾸고, 인류를 구원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정직과 성실이라는 정신적 가치가 우리 사회에 제대로 자리 잡았을 때, 정치와 경제발전도 이루어질 수 있다고 보았다.

무작정 앞으로만 달려가던 시대에는 편법을 쓰더라도 더 많은 성과를 내는 것이 좋을지 모른다. 그러나 어느 정도 단계에 이르러서는 정직과 성실, 사랑 없이는 더 이상 발전할 수 없다고 보았던 것이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터져 나오는 많은 사건, 사고와 문제들이 정직과 성실, 사랑의 결여에서 발생하는 것임은 자명하다. 김 추기경의 리더십은 그야말로 '미래 한국형 리더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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