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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줄 쫙∼ 대구 역사유물] (25)해프닝으로 끝난 신라말 천도

통일제국 신라, 동쪽 끝 서라벌 대신 통치요충 달구벌 '기웃'

앞산 전망대에서 내려다본 대구시 전경. 신라 말 신문왕대에 추진된 달구벌 천도는 대구가 신라에 편입된 후 지역에서 일어난 일 중 가장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앞산 전망대에서 내려다본 대구시 전경. 신라 말 신문왕대에 추진된 달구벌 천도는 대구가 신라에 편입된 후 지역에서 일어난 일 중 가장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천도'는 한반도 전체를 아우르는 통치 리더십이 절실했던 신라가 경주의 편협성에서 벗어나 내륙으로 국가의 중심축을 옮기려 했던 고도의 통치전략이었다.

천도(遷都)는 천도(千道)중에 천도(天道)를 찾는 일?

국가의 통치 행위 중에 도읍을 옮기는 일처럼 복잡한 정치 행위가 있을까. 왕조 존립 차원의 국정 변화나 국난(國難) 같은 사유로 수도 이전이 이루어지기도 하지만 보통 천도는 고도의 정치적 목적에서 추진되는 것이 보통이다.

우리 역사를 통틀어 10번 내외의 천도나 그 시도가 있었다. 백제의 웅진 천도나 고려 최씨 정권의 강화도 천도처럼 피란 성격을 제외하고 대부분 수도 이전은 정치적 동기에서 진행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삼국시대 대구에서도 천도가 큰 사회적 이슈가 된 적이 있다. 신문왕 때 신라가 수도를 옮기려 했던 사건이다. 주지하듯 신라는 1천 년 동안 한 번도 도읍을 옮긴 적이 없다. 그런 신라가 단 한 번 시도했던 정책이었다. 신라 왕실의 일방적 추진에 의한 해프닝으로 끝나고 말았지만 두 지역에 미친 파장은 두 도시를 넘어 왕조를 흔든 사건이었다.

◆귀족 세력 약화 목적에서 천도 계획='삼국사기' 신문왕 9년 조에 '왕이 서울을 달구벌로 옮기려 했으나 실현하지 못하였다'라는 기록이 보인다. 달구벌 천도 시도는 대구지역이 신라로 편입된 후 지역에서 일어난 일 중 가장 큰 사건이었다.

신라 정부 천도의 배경에 대해 학계에서는 두 가지로 의견이 모인다. 첫째는 경주가 국토의 동남쪽에 치우쳐 있어 전국을 통치하기 어렵다는 지리적 한계설이고 또 하나는 경주의 진골 귀족들의 세력을 약화시켜 왕권을 강화시키려는 정치적 목적에서 시도되었다고 보는 설이다. 통일 후 급격한 인구 증가로 비대해진 왕경에 대한 고민도 있었을 것이다.

신라는 건국부터 귀족(부족)연맹체적 성격을 띠었고 삼국 중 귀족들의 발언권이 가장 센 체제였다. 통일 이후 한반도를 아우르는 중앙집권적 통치체제를 구상했던 신라 왕조 입장에서는 귀족들의 간섭에서 놓여나 새로운 리더십을 구상했고 천도는 그 실천적 대안이었다.

천도와 관련해 재미있는 기록이 하나 보인다. 신문왕 9년에 왕이 장산성(獐山城, 지금의 경산) 순행에 나섰다는 내용이다. 천도 후보지의 바로 턱밑인 셈이다. 학자들이 이 순행에 주목하는 이유는 왕의 순행이 천도를 위한 사전정비 작업이나 현장 확인의 성격이 강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경북대 사학과 주보돈 교수는 "신문왕 재위 초반 대구에는 천도를 위한 상당한 준비가 진행되고 있었다"고 말하고 "왕도로서 면모를 갖추기 위한 관청, 축성, 사찰 건축, 사민(徙民)이 실제로 추진되었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장산성 순행은 귀족들의 시선이 부담스러웠던 왕이 대구로 바로 향하지 못하고 먼발치에서 왕도의 청사진을 그려보았다는 추측이 가능하다.

◆군사'교통의 요지…신라 정부, 대구 주목=그러면 대구가 천도 후보지로 거론된 이유가 무척 궁금해진다. 학자들은 대략 세 가지로 그 현상을 요약한다.

첫째는 군사적 요충지로서 장점이다. 6세기 신라는 가야와 정복 전쟁을 치르면서 대구의 요새로서의 매력을 이미 경험한 바 있다. 두 수역(水域)을 끼고 있는데다 사방이 막힌 분지 지형이어서 진지(陣地)의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둘째는 교통 요지로서의 특징이다. 낙동강, 금호강 수계를 끼고 있는데다 남해와 중부 내륙을 넘나드는 사통팔달의 도시 매력은 신라 정부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다. 그 밖에 대구가 곡창지대가 넓어 농업 생산력이 풍부한 점이나 신라 5악 가운데 중악(中岳)인 팔공산을 끼고 있다는 종교'사상적 상징성도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신문왕에 의해 야심 차게 추진되던 천도 계획은 결실을 맺지 못하고 폐기되었다. 계획이 무산된 이유는 두말할 것도 없이 중앙 귀족들의 반대 때문이었다. 특히 비슷한 시기에 단행되었던 녹읍 혁파로 귀족, 관료들은 경제적, 사회적으로 큰 손실을 보았다. 위기감을 느낀 기득권층의 반발이 거세졌음은 물론이다. 더구나 즉위 초 김흠돌(金欽突) 반란 사건을 경험했던 왕으로서는 이런 귀족들의 집단적 반발이 정치적으로 큰 부담이 되었다.

◆수도 이전 무산…대구엔 긴 후유증=수도 이전이라는 한바탕 소란이 끝난 후 대구에는 긴 후유증이 찾아들었다. 우선 곳곳에 벌여 놓은 대규모 토목공사들이 모두 정지되면서 도시는 활력을 잃었고 지역민들은 낙심에 빠졌다.

왕실의 사민 정책에 의해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대구로 이주해왔던 이주민들의 고민도 점점 깊어졌다. 이들은 본래 자리로 가기 위해 짐을 꾸리거나 그냥 눌러앉을지를 고민하는 처지가 되었다. 무엇보다 왕경(王京) 시민의 꿈에 부풀어 있던 대구 사람들의 상실감이 무척 컸다.

대구인들이 느낀 패배감이 정서적 우울이라면 이후에 신라 정부가 대구지역에 퍼부은 홀대는 더 구체적이고 직접적이었다. 그도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천도 추진 과정에서 대구의 외형이 너무 비대해졌다. 대구 비상(飛上)의 꿈에 들떠 있던 지역민들의 기대 심리도 신라 정부엔 큰 부담으로 작용했다.

경주 세력은 대구의 기존 무게 중심을 흩트리려는 전략을 구사하기 시작한다. 우선 행정 중심이 달성 토성에서 위화(◆火, 지금의 신천 상류, 가창)로 옮겨갔고 달구벌은 그 아래 속현으로 예속됐다. 불로동 세력, 동촌지역도 경산 세력(압독국) 휘하로 옮겨갔고 화원의 중심도 성산동에서 설화 쪽으로 이동했다. 이후로 한두 번 지방제도의 개편이 있었지만, 대구의 위상과 관련한 주목할 만한 변화는 없었다.

◆마무리하며=신라 왕실의 추진에 의해 계획된 천도가 실패로 돌아간 후 그 부담은 고스란히 대구의 몫이 되었다. 이후 신라 정부에 의한 강제적 다이어트가 시작되었다. 부쩍 커버린 대구의 몸집은 경주 세력에 큰 골칫거리였기 때문이다.

이렇게 한바탕 소란을 겪고 난 대구 지역은 신라 말에 다시 한 번 역사의 무대에 등장하게 된다. 신라 하대 왕위 쟁탈전의 여러 사건이 대구를 무대로 전개되었기 때문이다. 김우징의 난 당시 장보고의 주력 부대가 경주로 진군할 때 격전을 벌인 곳이 팔공산 일대고 왕건과 견훤이 후백제 패권을 놓고 결전을 벌인 곳도 대구였다. 신라 하대 여러 정치적 상황 때문에 천도가 실행되지 못했지만, 신라 말 이후 대구는 여전히 지방과 왕경을 잇는 중심축이자 균형추였던 것이다.

글'사진 한상갑 기자 arira6@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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