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월드컵 축구대표팀 결산] <상> 고배 마신 홍명보호

들러리 된 의리 축구…능력 과신 '초라한 성적표'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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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산 9번째 월드컵 본선에 진출한 한국 축구 대표팀이 브라질에서 1무 2패의 참담한 성적표를 받아들었다. 본선 조별리그에서 1승도 거두지 못한 것은 1998년 프랑스 월드컵 이후 16년 만이다. 한국 축구가 과거의 '들러리' 신세로 다시 되돌아간 것이다.

◆홍명보, 너무 일찍 든 독배

이번 월드컵에서 가장 큰 생채기가 난 사람은 홍명보(45) 감독일 수밖에 없다. 선수로서 4회(1990'1994'1998'2002년), 코치로서 1회(2006년)를 뛴 한국 월드컵 역사의 산증인으로서 국민의 기대를 한몸에 받았지만 실망감만 안겨준 탓이다.

홍 감독이 브라질 월드컵 대표팀을 맡은 것은 1년여 전인 지난해 6월 25일이다. 당시 대한축구협회가 최강희 전임 감독의 후임으로 홍 감독을 미리 내정해두고 '쇼'를 한다는 비난이 일기도 했지만 축구 팬들의 신뢰는 높았다. 그가 선수 시절뿐 아니라 지도자로서 보여준 '능력' 덕분이었다. 홍 감독은 2009년 국제축구연맹(FIFA) U-20 월드컵 대회 8강 진출에 이어 2012년 런던 올림픽에서 한국 축구 사상 첫 동메달을 획득했다. 시민들 사이에선 "홍 감독의 '기'가 워낙 강해 한국이 약한 팀 전력에도 16강에는 오를 것"이란 우스갯소리가 나돌 정도였다.

하지만 그를 향한 팬들의 애정 어린 시선은 점점 물음표로 바뀌었다. '원 팀, 원 스피릿, 원 골'(One Team, One Spirit, One goal)을 팀 슬로건으로 내세우고 팀을 정비한 이후에도 시원찮은 성적이 이어졌다. 그해 7월 국내에서 열린 동아시안컵에선 호주'중국과 연거푸 0대0으로 비긴 뒤 일본전에선 1대2로 패했다. 이어 8월 수원에서 열린 페루와의 친선경기마저 0대0 무승부를 기록한 홍 감독은 9월 6일 인천에서 치른 '약체' 아이티와의 평가전에서 겨우 4대1로 이겨 첫 승리를 맛봤다. 홍 감독이 대표팀을 이끌고 거둔 성적은 이번 월드컵 본선 1무 2패를 포함해 5승 4무 10패에 그치고 있다.

◆투혼은 어디로?

경기에 나설 선수 선발은 감독의 전권이다. 결과에 책임만 지면 된다. 국가대표팀에 뽑힌 선수라면 실력은 검증받은 선수인 만큼 '베스트 11'을 어떻게 구성했느냐는 부적절할 수도 있다. 홍 감독 역시 이번 월드컵 대표팀을 꾸리면서 불거진 '의리 엔트리' 논란에 대해 "어릴 때부터 함께해 온 선수들이 얼마나 성장했는지를 보여주는 게 중요하다"며 "런던 올림픽 출신 선수들이 그동안 정신력은 강해진 것 같다"고 반박했다.

하지만 선수들은 '꿈의 무대'인 월드컵에서 많은 문제점을 드러냈다. 유럽 빅리그에서 뛰면서 실력이나 정신력에서 성장했다는 평가를 받을 만한 선수는 거의 눈에 띄지 않았다. H조 첫 경기에서 러시아와 비기면서 달라진 모습을 보이는 듯했지만 그뿐이었다.

특히 16강행의 고비였던 알제리전 전반전은 이번 대회 '조별리그 최악의 45분' 가운데 하나로 꼽혀도 무리가 아닐 정도의 졸전이었다. 승점 3점이 반드시 필요했지만 선제골을 뺏긴 뒤 '태극전사'는 오합지졸로 전락했다. 후반 손흥민'구자철의 만회골이 그나마 위안거리였다. 16강에 오른 알제리를 '1승 제물'로 판단했다는 것 자체가 부끄럽게 여겨지는 경기였다.

복잡한 경우의 수를 눈앞에 뒀던 벨기에와의 3차전은 16강 여부를 떠나 중요한 한 판이었다. 무기력했던 알제리전 참패를 딛고 국민에게 희망을 선사해야 했다. 그러나 대표팀은 전반 막판 상대 선수의 퇴장으로 잡은 수적 우세에도 골을 넣지 못하고 0대1로 패배했다. 마지막 자존심마저 지키지 못한 셈이었다. 홍 감독은 1년 전 사령탑을 맡으면서 "최고의 선수들을 불러들이기보다는 최고의 팀을 만들기 위해 선수들을 선발할 것"이라고 밝혔지만 대표팀의 현주소는 '최고의 팀'과는 거리가 너무 멀었다.

◆아시아의 한계?

홍 감독은 브라질 입성 전 "월드컵이 끝나고 나면 빵점 짜리 감독으로 남을 수 있다. 결국 중요한 것은 결과"라고 말했다. 마치 자신에게 쏟아질 비난을 예견한 듯한 발언이었다. 그는 16강 탈락 확정 직후 "우리가 많이 부족했고, 그중에도 내가 가장 많이 부족했다"고 밝혔다.

하지만 모든 잘못이 홍 감독에게만 있다고 보는 것 역시 무리다. 아시아 국가들이 하나같이 16강행에 실패한 게 대표적이다. '사커루' 호주는 3전 전패(3득점 9실점)로 일찌감치 짐을 쌌고, 아시아 지역예선 1위 이란은 '침대 축구'라는 비아냥 속에 1무2패(1득점 4실점)의 성적만 남겼다. 한국과 마찬가지로 8강을 노렸던 일본 역시 1무2패(2득점 6실점)의 암담한 결과에 충격을 받았다. 아시아 소속 출전국이 조별리그에서 단 1승도 올리지 못한 것은 1990년 이탈리아 월드컵 이후 24년 만이다. 세계가 '제로 톱' '티키타카' 등 전술적인 진보를 거듭하고 있지만 아시아는 이러한 흐름에서 완전히 뒤처져 있다는 게 이번 대회를 통해 새삼 증명된 셈이다.

이와 관련, 한국 축구의 마스터플랜을 책임진 대한축구협회도 비판에서 벗어날 수 없다. 1년이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시간이지만 홍 감독이 대표팀을 맡은 것은 단 1년이다. 반면 16강에 진출했던 2002년 한'일 월드컵과 2010년 남아공월드컵은 거스 히딩크, 허정무 당시 감독들한테 3년 이상 임기를 제대로 보장해줬다.

축구협회의 전략 부재도 문제로 지적되고 있다. 산하 기술위원회는 올해 1월에야 네덜란드 출신의 전력분석가 안톤 두 샤트니에 코치를 데려왔다. 불충분한 분석 데이터를 갖고 머릿속으로만 '사상 첫 원정 8강'이란 허망한 환상을 키워온 셈이다.

브라질 상파울루에서 이상헌 기자 davai@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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