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과 며칠 전 비 오는 날에 있었던 일이다. 이날도 어김없이 오후 6시에 출근해 구급장비를 꼼꼼히 챙겼다. 이처럼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날에는 어김없이 응급환자가 발생했기에 그 어느 때보다 구급장비를 더 꼼꼼히 챙겼다. 아니나 다를까 오후 9시가 넘어갈 무렵 출동 벨 소리가 또다시 내 귓가를 자극한다. "○○구급대, 구급출동! 위치는 ○구 ○○동 ○○○번지 골목길 내 주택 1층! 50대 남자 심정지 추정! ○○구급대, 신속히 구급출동하세요!"
다급한 출동 소리에 내 마음과 몸도 다급해진다. 보호자가 환자의 의식과 호흡이 없다고 신고를 했고 현재 구급상황관리센터에서 보호자에게 지금 심폐소생술을 지시해 현재 시행 중이라는 얘기를 들었다. 보호자가 심폐소생술 중이라는 무전 소리에 출동을 나가는 동료와 난 더욱 긴장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현장에 도착하자마자 구급차에 있는 자동제세동기와 응급처치 가방을 들고 골목길로 달려나갔다. 골목길에 서 있던 아주머니와 만나고 환자의 집으로 들어서니 50대 남자로 보이는 환자가 의식과 호흡 없이 누워 있었다.
심폐소생술 실시와 자동제세동기 부착을 위해 환자 옷을 올리는 순간 환자의 체온이 차갑게 느껴졌다. 환자 입에 기도유지기를 물리려 입을 벌렸는데 다물어진 입은 벌어지지 않았다. 보호자에게 환자를 마지막으로 본 게 언제였느냐고 물어봤다. 보호자는 두세 시간 전이라고 대답했다. 제세동기에서 보이는 환자의 멎어버린 심장 리듬, 차가운 체온. 이미 사후강직이 와있는 턱관절…. 모든 정황이 환자를 살릴 수 없게 만들었다.
이미 사후강직이 시작됐다는 것은 심장마비가 한참 동안, 그러니까 적어도 30분 이상 진행되었다는 것을 의미하기에 난 상황실에 있는 의료 지도 의사 선생님께 전화를 드렸다. 사후강직으로 인한 심폐소생술 유보'중단 지시를 받고 보호자분께 설명을 드려야 하는데 차마 말을 떼기가 쉽지가 않았다. 차분히 보호자에게 설명을 드리고 위로의 말을 전하고 경찰을 기다리고 있을 때쯤 갑자기 내 가슴에 있던 무전기에서 나를 찾는 다급한 상황실 수보대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현재 위치에서 구급출동을 나가라는 거였다. 또다시 들려오는 무전소리에는 80세 할머니 심장마비 환자가 또 발생했고 현재 타 구급대에서 출동 중이라는 거였다. 불과 3~5분 간격을 두고 내 소속 관할에 심장마비 환자가 2명이 생겨버렸다.
보호자에게 양해를 구하고 현장을 경찰에 인계한 후 두 번째 심장마비 환자에게 향했다. 도착해서 보니 인근 타 구급대에서 심폐소생술 중이었고 제세동기 심전도상 무수축이었다. 타 구급대원들과 손발을 맞춰가며 심장마비가 발생한 할머니에게 내가 할 수 있는 응급처치 능력을 이용해 처치를 하였다. 보호자로 보이는 할아버지와 며느리가 할머니를 보고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이 너무나 안쓰러워 보였다. 8분이 넘게 응급처치를 시행했지만 돌아오지 않는 할머니의 심장은 가족들이 애타게 마음 졸이는 것도 모르는지 야속하게 움직이지 않았다. 할아버지에게 할머니가 현재 갖고 계신 지병이 뭔지 물어봤다. 할아버지는 아쉬운 듯한 목소리로 췌장암이 있어서 현재 약을 복용 중이고 병원 진료를 받고 계신다고 하였다. 더 이상 현장에서 지체할 수 없기에 나와 동료 구급대원들은 할머니를 구급차로 옮기고 가장 가까운 인근에 있는 대학병원 응급실로 할머니를 이송했다. 이송하는 중간에도 난 쉬지 않고 심폐소생술을 시행하였다.
병원에 도착하고 나서 병원 의료진에게 할머니의 지병과, 현재 상태와 쓰러졌을 당시의 보호자가 목격했던 상황을 인계하고 뒤를 돌아보니 할아버지가 금세라도 눈물을 흘리실 것 같은 눈빛으로 할머니를 바라보고 계셨다. 병원 의료진의 응급처치가 시작되고 한참이 흘렀을 무렵 응급소생실에서 나오는 의사 선생님의 땀방울과 서서히 닫히는 소생실 문틈으로 의료진의 계속되는 심폐소생술 모습이 살짝 비쳤다. 난 마음속으로 '아직도 할머니 심장이 돌아오지 않고 있구나, 기적이라는 게 정말 있으면 저기 멀리서 애처롭게 바라보는 할아버지와 심장이 멎어 있는 할머니에게 일어났으면 좋겠다'라고 생각했다. 의사 선생님과 잠깐 면담을 하신 할아버지 얼굴과 붉어진 눈시울에서 기어코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리는 걸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할아버지…. 정말 죄송합니다…. 제가 할 수 있는 한 응급처치를 다 했는데 뭐라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할아버지를 뵐 면목이 없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난 할아버지께 진심으로 고개 숙여 사과를 드렸다. 할아버지는 흐르는 눈물을 닦으시며 "아닙니다, 대원님. 정말 고맙습니다. 우리 할머니도 정말 고마워할 겁니다…"라며 나에게 악수를 청하셨다. 난 땀으로 젖어버린 장갑을 벗고 정중히 고개 숙여 할아버지와 악수를 했다. 두 손으로 내 손을 꼭 잡아주시는 할아버지 손이 너무나 따뜻했다. 돌아가신 할머니와 남아계신 할아버지를 뒤로하고 돌아 나오는 병원 응급실 복도가 너무 길게만 느껴졌다. 센터로 귀소하는 내내 동료와 난 할머니를 살리지 못했다는 좌절감과 안타까움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양준호 대구 중부소방서 119구급대 소방사
댓글 많은 뉴스
"재산 70억 주진우가 2억 김민석 심판?…자신 있나" 與박선원 반박
이 대통령 지지율 58.6%…부정 평가 34.2%
김민석 "벌거벗겨진 것 같다는 아내, 눈에 실핏줄 터졌다"
트럼프 조기 귀국에 한미 정상회담 불발…"美측서 양해"
김기현 "'문재인의 남자' 탁현민, 국회직 임명 철회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