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정혜영의 근대문학을 읽다] 한국 최초의 민중문학 작가는 여자였다

1930년대의 강경애. 당시 양주동의 연인이기도 했다. 그의 대표작인
1930년대의 강경애. 당시 양주동의 연인이기도 했다. 그의 대표작인 '인간문제'는 서울대 권장도서 100에도 선정됐다.

식민지 시기 대구고등보통학교(지금의 경북고등학교) 수영장 행사 풍경을 담은 한 장의 사진이 있다. 사진의 풍경은 단순하다. 대구고등보통학교 수영장 뒤로 낮은 가옥들이 펼쳐지면서 그 사이, 높은 굴뚝이 위압적으로 솟아올라 있다. 오래된 사진의 빛바랜 색깔 때문인지, 아니면 주변 가옥들과의 부조화 때문인지 사진 속의 굴뚝은 상당히 그로테스크하게 느껴진다.

그 굴뚝은 1919년 봄, 지금의 대봉동 삼익맨션 자리에 들어선 카타쿠라(片倉) 제사공장의 굴뚝이다. 동일한 시기, 이웃한 두 건물에서 이제 막 15, 16세에 달한 소년, 소녀들이 겪는 세계는 너무나 상반되었다. 한쪽에서는 15, 16세의 소녀들이 100℃의 펄펄 끓는 물에서 나온 생사를 만지며 하루 14시간 일을 하고 있었고, 한쪽에서는 15, 16세의 소년들이 수영장을 겸비한 학교에서 새로운 근대적 교육을 받고 있었다.

이들 간의 삶의 명암 대비는 문학적 소재로서 선택되는 과정에서도 나타난다. 대부분의 작가들은 근대 교육을 받은 신청년, 소위 모던 청년들의 삶에 관심을 기울였다. 그들은 모던 청년들의 연애, 소비 취향, 기호, 심지어는 생활의 동선까지 따라가면서 소설을 썼다. 그에 반해 제국의 식민지 수탈의 전형적 공간이었던 공장 노동자들의 삶의 애환은 작가들의 관심을 그다지 얻지 못하였다. 이 편파적 관심 속에서 강경애(1906~1943)는 '인간문제'(1934)를 통해서 방적공장 여직공의 삶을 중심으로 식민지 노동 문제를 다루고 있다.

소설에서는 아름답고 순수한 시골 처녀 선비가 지주에게 정조를 유린당한 후 방적 공장 노동자가 되어 열악한 노동조건 속에서 폐병에 걸려 삶을 마감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채 스물이 되지 않은 나이로 죽음을 맞이한 선비의 삶의 이력은 카타쿠라(片倉) 제사 공장의 수많은 소녀들이 겪었고, 겪게 될 삶의 경로였다. 그러나 식민지 모순된 경제구조가 내포하고 있는 이와 같은 '인간문제'를 사회주의 문학을 주창했던 다수 작가들은 의외로 제대로 포착해내지 못하였다. 그것은 단지 일제강점기하라는 시대적 한계 때문만은 아니었다. '카프', 즉 조선프롤레타리아 예술동맹의 작가들은 대부분 동경 유학생 출신의 엘리트들이었고, 그들이 접한 것은 현실이 아니라, 이론이었기 때문이다.

사회주의 문학운동의 핵심단체였던 카프에 소속된 작가도 아니었고 중앙문단과는 격리된 중국 간도에 거주하고 있던, 남성도 아닌 여성작가가 식민지의 본질적 '인간문제'를 다룬 소설을 발표한 것은 당시 문단에서는 상당히 센세이셔널한 사건이었다. 말하자면 강경애는 당시 문단의 상황에서 보자면 철저히 '비주류'였기 때문이다. 그 '비주류'가 이뤄낸 문학적 성과에 대해서 동경 유학생 출신의 오만한 남성작가들이 느꼈을 불쾌감은 다소 짐작이 가는 바이다. 경제적 궁핍, 중앙문단과의 격리에서 오는 고립감, 불행한 결혼생활, 여성이라는 한계, 이 모든 개인적 문제들과 끊임없이 부딪치면서 강경애는 글을 쓰고 또 썼다.

서른아홉의 젊은 나이로 삶을 마감하는 그 순간까지 강경애는 이역 먼 땅 간도에서 현실과의 치열한 응전을 포기하지 않았다. 무엇 하나 가진 것 없는 비주류의 위치에 있었으면서도 현실과의 싸움을 포기하지 않았던 이 강인한 응전의 힘 덕분에 강경애는 식민지 현실을 꿰뚫어 볼 수 있었던 것은 아닐까. 삶의 바닥에 서 본 사람들이 지닌 무서운 생명의 힘을 그녀 역시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정혜영 대구대 기초교육원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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