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의제 민주주의에서 선거로 뽑힌 대표는 어떤 존재여야 하는가. 뽑아준 사람들의 희망과 요구를 그대로 실행하는 전달자인가 아니면 진정한 유권자의 이익이 무엇인지 스스로 판단해야 하는 '독립적 수탁자'인가. 근대 이후 대의제 민주주의가 정착되는 과정에서 지속적으로 제기됐고 미국 건국 초기 연방주의자와 반연방주의자 간에도 첨예하게 벌어졌던, '위임'과 '독립'의 논쟁이다. 어느 쪽이 맞을까.
상식은 전자를 자명하게 받아들인다. 선거 때마다 국회의원 후보들은 저마다 '국민의 종' '심부름꾼' '머슴'이 되겠다고 한다. 하지만 진실은 상식을 배신한다. 대의제 정부의 메커니즘은 대표는 단순한 전달자가 아니라 '독립적 수탁자'임을 보여준다. 이는 보수주의 정치철학의 설계자 에드먼드 버크가 1774년 '브리스톨 선거인단에게 드리는 말씀'이란 연설에서 공식화한 뒤 대의제 민주주의의 근간으로 자리 잡은 개념이다. 그 연설의 요지는 "국회의원은 유권자의 대리인이 아니라 대표이며 따라서 국회의원은 유권자의 눈치를 보면서 자신의 판단과 의견을 굽히지 않고 자신의 판단과 양심에 따라 행동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주장의 제도화가 공약과 유권자의 명령에 대한 법적 구속력 및 대표에 대한 임의적 '해임'과 '소환'의 불인정이다.('선거는 민주적인가' 버나드 마넹) 이에 따른 대표의 '배신'에 대한 유권자의 보복은 선거에서 '다시 뽑지 않을 권리'로 보장된다. 여러 나라에서 주민소환제(우리나라는 지방자치단체장과 지방의원에게만 적용)가 시행되고 있는 사실은 이런 주장에 이의를 제기한다. 그러나 소환은 엄격한 요건하에서만 가능하다. 임의적이 아니라는 얘기다. 결국 소환제의 존재와 상관없이 대표가 유권자의 대리인에 그쳐서는 안 된다는 원칙은 유효하다.
새정치민주연합의 '세월호 특별법 투쟁'은 이러한 대표가 지향해야 할 존재양식의 파기이다. 새정치연합은 '유가족이 동의하는 세월호 특별법'에서 요지부동이다. 이를 관철하기 위해 정기국회까지 내팽개치고 진도 팽목항으로 달려갔다. 자식을 눈앞에서 수장시켜야 했던 유족의 아픔에 공감하고 그들의 뜻을 받드는 것을 탓할 사람은 없다. 문제는 진상조사위원회에 수사권과 기소권을 부여하라는 그들의 요구가 너무 나갔다는 점이다.
민주주의 국가 형사법의 대원칙은 피해자 자력구제 금지다. 그것은 국가를 만인 대 만인 투쟁의 야만 상태로 빠뜨리는 린치(私刑)이기 때문이다. 이런 상태에서 국가는 기능을 할 수 없다. 그런 점에서 근대 국가의 성립 역사는 린치 금지와 형벌권의 국가 전유(專有)에 의한 사적 폭력의 감소 과정이었다고 할 수 있다.(최근 번역 출간된 미국의 심리학자 스티븐 핑커의 저서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는 이를 잘 보여준다.)
새정치연합도 린치 금지가 근대 국가의 기본 질서임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모른다면 정말로 큰일이다) 그럼에도 '유족 요구대로'를 외치고 있는 것은 대표가 대리인이 아니라 독립적 수탁자여야 함을 망각했다는 것에 다름 아니다. 이런 행태가 바로 포퓰리즘이다. 그것도 유족들의 아픔에는 공감하지만 수사권과 기소권 요구는 곤란하다는 다수 국민과 등을 돌리는 자멸적 포퓰리즘이다. 이런 정신구조에서는 "국민 정서가 항상 옳은 것은 아니다. 국민 여론을 무조건 따를 필요는 없다"(노영민 의원)는 전지적(全知的) 오만은 필연적이다. 자기 입맛에 맞지 않으면 국민은 그들에게 우중(愚衆)일 뿐이다.
세월호 침몰의 '비밀'(?)을 밝혀내지 못한 검찰의 무능-유족은 이를 의도적인 것으로 의심하고 있다-은 직접 수사도 하고 기소도 해야겠다는 생각을 갖게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렇게 하는 순간 피해자 자력구제는 보편화의 길을 열게 된다. 공형(公刑)을 못 믿는 것이 자력구제의 이유라면 사소한 형사 사건이라 해서 자력구제 대상에서 배제돼야 할 이유가 없다. 이는 '눈에는 눈, 이에는 이'로 무장한 크고 작은 혈연, 비혈연 이익집단의 무질서한 할거로의 퇴행이나 마찬가지다. 이런 무질서에서 '안전'은 없다. 정의는 린치를 린치로 되갚는 것을 의미하고 복수가 복수를 낳으며 모두가 피해자인 동시에 가해자가 된다. 새정치연합은 이런 사실을 유족들에게 설명하고 그들의 요구는 무리라고 했어야 했다. 공당(公黨)이라면 그것이 정상이다. 그래서 새정치연합은 비정상이다. 그것도 아주 절망적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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